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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실패에서 ‘젠더’라는 공통분모를 보다

등록 2020-02-01 10:29수정 2020-02-02 16:55

[토요판] 여자의 사표 ① 퇴사의 이유
2018년 12월, 나는 회사를 10년11개월 다니고 사표를 냈다. 누군가의 조언대로 ‘사표를 내겠다, 어쩐다’ 결심의 나열 없이 그저 전자결재를 올렸더니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게티이미지뱅크
2018년 12월, 나는 회사를 10년11개월 다니고 사표를 냈다. 누군가의 조언대로 ‘사표를 내겠다, 어쩐다’ 결심의 나열 없이 그저 전자결재를 올렸더니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게티이미지뱅크

“인턴이 하실 일은요.” 인턴 관리자가 파일을 하나 건넸다. ‘인턴 업무 목록’이라고 연두색 파일 앞장에 제목이 붙어 있었다. 파일에는 ‘치료실 정리’ ‘탕비실 다과 정리’ ‘문서 세단’ ‘문서 대장 확인’ ‘도서 목록 확인’ 등 대여섯가지 업무가 적혀 있었다.

놀이치료실의 먼지를 털고, 상담이 끝난 뒤 아이들이 보상으로 가져가는 간식들을 채우고, 폐기해야 할 문서들을 파쇄기에 넣는다. 가끔 화장실 청소도 한다. 내가 인턴으로 일하는 곳은 심리적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집단 프로그램 및 놀이치료, 개인 상담, 가족 상담 등을 하는 정신상담센터다. 나는 상담심리 대학원을 다니며 아이들을 상담하고 치료하는 경험을 쌓고 있다. 수련 과정이라고 한다. 한국 사회 ‘수련’에는 잡일도 당연히 포함된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2018년 12월, 나는 회사를 10년11개월 다니고 사표를 냈다. 다들 사표를 내면 한번쯤은 정치인이 된다. 사의를 철회하게 된달까. 혹은 사표를 조건으로 거래에 성공한다. 나 역시 처음 ‘그만두겠다’고 팀장에게 말했다가 긴 휴가를 얻고 사표를 다시 가슴속에 접어두었다.

사표 이후 오는 것들에는 사랑과 오해와 협박과 한탄이 뒤엉킨 술자리가 있다. “내가 너 없이 회사를 어떻게 다니냐…” 같은 주정과 함께 “너, 애들은 그냥 저절로 큰다. 그리고 애들은 조금만 더 크면 엄마가 일하는 걸 더 좋아해. 돈 벌어야 좋은 학원 보내주고 좋은 옷 사주거든”이라는 말에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너, 그만둔 ㄱ선배는 아직도 후회한다더라. 먼저 그 선배를 한번 만나봐”라고 ‘퇴사 후회자’와 급번개가 주선된다. “너는 돈 버는 남편 있어서 좋겠다. 에휴” 같은 ‘남편 덕 보는 여성(?)’이라는 취지의 말들로 불편해지는 일도 다반사다. 저도 좋아서 그만두는 거 아니거든요!

그 모든 통과의례를 거친 뒤 나는 다시 사표를 냈다. 한번 꾼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조언대로 ‘사표를 내겠다, 어쩐다’ 결심의 나열 없이 그저 전자결재를 올렸더니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돌이켜보자면 나의 퇴사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심리학도로서 내 다면적 인성검사(MMPI)를 분석해보자면,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과 가면으로 무장한 ‘방어적 인간’이다. 엠엠피아이는 정신과 임상에서 널리 쓰이는 자기보고형 성격검사다.

나는 이 검사에 진실하게 임하고 있는지, 성의 없이 ‘예’나 ‘아니요’로 일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등 답변의 진실성을 측정하는 항목에서 일관되게 ‘아니요’로 답하고 있다는 척도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러나 ‘의도적 거짓말’을 탐색하는 척도에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나는 매우 힘든데도 ‘힘들지 않다’, 기분이 나쁜데도 ‘나쁘지 않다’라는 자기최면을 뼛속까지 채우고 있었다. 스스로는 그게 최면이자 가면인지 모르면서 말이다.

나의 방어와 자기 문제 축소 인지는 갑자기 분출한 (것처럼 보이는) 퇴사 욕구와 관련이 깊다. 나는 죽을 만큼 힘든데 ‘괜찮다, 괜찮다’ 안팎으로 되뇌면서 회사를 다녀왔다. 원하는 부서로 발령 나는 일이 연속해 좌절되면서 ‘인사는 원래 그런 거야,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100명 중 10명이야. 10 대 90의 사회인 거지’라고 말해왔다. 만삭에 자발적 야근을 이어가면서 밤 12시 막차에 올라타서 술 냄새에 구토 직전 상황에 나를 몰아넣고도 ‘임신모험담’으로 각색해 기억저장 신경세포에 저장했다. 그 외에 자기비하의 반복, 반쪽짜리 네트워킹 등 이후에 말할 또 다른 실패들이 차곡차곡 쌓여 가슴팍까지 차올라 어느 순간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지 못할 심리적 마비 혹은 무기력의 상태를 경험했다. 결국 거기에서 나를 구하고자 사표를 냈다.

나는 이 실패들에서 ‘젠더’라는 공통분모를 본다. 나의 실패들은 나 개인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많은 여자들이 품었고 던져버린 사표의 속사정이기도 하다. 여전히 ‘말해도 되나’라는 공고한 마음의 벽을 깨고 그 속사정을 꺼내보려 한다. 이 속사정이 누군가에게는 지속가능한 회사 생활의 응원이 되기를, 누군가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연료가 되기를 바라면서. 자유기고가 리담

▶ 리담: 전 회사인간. 현 자유기고가. 아이들의 마음을 공부하며 아이들과 치료실에서 만나고 글을 쓴다. 내가 여성이어서 겪은 불편과 무력감을 내 딸이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며 페미니즘을 읽고 생각하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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