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빌 게이츠>의 멀린다 게이츠(왼쪽)와 빌 게이츠. 멀린다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던 때에 대해 “나답게 행동하기보다 내가 보기에 회사에서 잘하고 있는 남자들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넷플릭스 갈무리
지난해 말 넷플릭스를 달구었던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에서 내 시선을 끈 사람은 빌 게이츠가 아니라 멀린다 게이츠였다. 빌 게이츠의 아내 말이다. 1986년, 당시 업계 1위였던 아이비엠(IBM) 취업 제의를 거절하고 그녀가 선택한 직장은 지금의 1% 규모에 불과했던 신생기업 마이크로소프트였다.
멀린다는 듀크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해 학사 과정과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5년 만에 마치고 22살에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했다. 입사 뒤 매우 짧은 시간에 부서 책임자가 되고 뒤이어 마케팅을 총괄하며 10년을 뜨겁게 일했다. 그랬던 그녀가 두 살배기 딸과 함께 크고 차가운 집에서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일을 그만두고 아이만 키우겠다는 선택은 멀린다가 했다. 멀린다는 최근 펴낸 책 <누구도 멈출 수 없다>에서 그 선택의 순간을 “양육과 관련해 첫 번째 잘못된 아이디어를 내놓은 때”라고 기록한다.
멀린다는 왜 회사를 그만두는 선택을 했을까. 나는 멀린다가 회사 생활을 하면서 처음 사표를 고민한 순간에 주목한다. 멀린다는 입사 뒤 공격적으로 논쟁하며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약점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는 회사 문화에 지쳐버렸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거기에 맞췄다. “나답게 행동하기보다 내가 보기에 회사에서 잘하고 있는 남자들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와, 여기에서 잘하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 반신반의하면서 말이다. 이 선택을 한 그에게는 “내가 회사에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나다울 수 있을까?” “나는 (제안받았던) 매킨지로 가야 했나” 하는 질문과 검열이 뒤따랐다. 매킨지라고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회사 생활 대부분을 ‘남자처럼’ 일했다. 대표적인 건 목소리다. 업무용 목소리와 비업무용 목소리가 따로 있었는데 간혹 친구들과 있을 때 업무 전화가 걸려와 통화를 마치고 나면 친구들은 어김없이 놀려댔다. “방금 그 중저음의 신사는 누구?” 나는 생물학적 여성의 평균치에 가까운 내 본연의 목소리로 회의에서 발언하면 상대방이 나를 가볍게 여길 거라 생각했다. 입사 1년차에 “목소리가 너무 애 같다”고 지적질당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남성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업계 용어를 생각 없이 썼고, 상대방이 나를 편하게 느끼도록 과하게 털털한 척했다. 21세기를 살아가던 내 머릿속에서 ‘일 (잘)하는 사람의 전형’은 남성이었다. 세상에!
그리스·로마 연구의 권위자이자 영국 논객 메리 비어드 케임브리지대 교수(고전학)는 그의 책 <여성, 전적으로 권력에 관한>에서 우리는 왜 깊고 묵직한 목소리가 공적인 발언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논증한다. 3000년 전 <오디세이>에서 풋내기 아들 텔레마코스는 어머니의 발언을 막아선다. “어머니의 직분인 베 짜기에 매진하세요. 공적 발언은 남자들의 일, 그중에서도 제 일입니다.” 기원전 1세기, 로마 여성 마이시아는 법정에서 자기를 변호했다는 이유로 ‘안드로기노스’(양성성을 가진 존재)라고 불렸다. 이 유구한 전통은 현대까지 이어져 마거릿 대처는 피치를 낮춘 목소리를 훈련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완성했고, 앙겔라 메르켈부터 힐러리 클린턴까지 검은 바지 정장으로 자신의 리더십과 이미지를 완성했다.
메리 비어드는 이런 ‘남성 모델링 전략’이 “신속한 처방”일 수는 있지만 “여성들에게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겉돈다는 느낌, 자신의 것이 아닌 언변을 흉내나 내는 존재가 된 듯한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고 말한다.
많은 여성들은 흉내내기를 시작으로 자신만의 생존 전략을 세워 ‘성공 서사’를 써나가기도 하지만, 또 많은 여성들은 흉내내기에서부터 지쳐서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그 자리’에서 이탈한다. 그냥 일만 하기도 벅찬 매 순간에 태도와 방식을 결정하는 데까지 에너지를 배분하는 순간, 회의감도, 그로 인한 소진도 빠르게 진행된다. 나 역시 이 ‘흉내내기’에서 비롯된 자아의 분열에서부터 소진이 시작됐다.
자유기고가 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