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 줄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 영화 <기생충>에서 아버지 기택의 대사가, 수도 없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희대의 21세기 역병은 모두의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2020년을 앞두고 야심찬 계획을 짰다. 자유, 여유, 사색. 뭐 이런 것들이다. 일과 육아와 대학원. 세 바퀴를 동시에 돌리다보니 늘 버둥거렸다. 나를 돌아보고, 일상에 집중하며 두 번째 인생을 살기 위한 준비를 하자.
지난해 퇴사 1년차에 이 계획은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 거부로 실패했다. “가기 싫다”며 날마다 어린이집에서 1시간씩 울어대는 아이의 행복을 내 자유와 맞바꾸지 못했다. 결국 심리학 대학원 다니고 상담센터 갈 시간을 확보해야 했던 나는, 내가 버는 수입은 0에 가깝지만 돌봄 선생님의 도움을 계속 받기로 했다. 생활비는 남편이 부담하고 교육·양육비는 내가 부담하던 지출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나는 퇴직금을 파먹기 시작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최소한의 시간에 모든 일을 처리하려다 보니, 내 시간은 천 피스 퍼즐 조각처럼 잘게 나뉘었다.
1년간 집에서만 노는 게 너무 심심했던지 아이는 “다섯 살에는 꼭 유치원에 가겠다”고 했다. 유치원 예비소집일에 가방을 받아 들고 함박웃음을 웃는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나는 실행하지 못한 퇴사 1년차 계획을 더 촘촘하게 세웠다.
계획이 촘촘할수록 실패로 인한 무력감도 큰 법이다. 기택이 말한 것처럼. 아, 코로나19여. 신종 바이러스로 인한 감금 육아가 어느 새 석 달째다. 마스크며, 코와 입 등의 점막에 쉽게 걸린다는 녀석의 갈고리 모양 돌기를 분질러버리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종 바이러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이가 있는 퇴사한 여성은 검색창의 자동완성 기능처럼 전업 엄마가 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간과한 내 잘못이다. ‘무임금 노동’인 엄마가 주 직업이 되고, 다른 일은 자투리 시간에 해야 한다. 돌봄을 위해 퇴사하는 게 아니라면 유아기의 아이가 있는 여성은 아이를 청소년기에 진입시킨 뒤 퇴사해야 ‘퇴사 이후’ 를 모색할 수 있다.
에스에프(SF) 소설가 어설라 르귄이 상상한 세상의 법칙은 이생에서는 불가능한 걸까. 그가 <어둠의 왼손>에서 창조한 ‘겨울 행성’의 게센인에게는 성별이 없다. 여성이 28일 주기로 생리를 하듯 모든 게센인들이 26~28일 성의 주기를 갖고 있다. 21~22일 동안은 성이 잠재 상태인 ‘소메르’기이고, 22~23일부터 5일 정도 발정기인 ‘케메르’기에 들어간다. 케메르기인 두 게센인이 만나 성적 결합을 하면 자극에 의한 호르몬 분비에 따라 남성과 여성이 결정되고 그로 인해 ‘누구나’ 임신하며 ‘누가’ 임신할지 모른다. 소설 속 이 행성을 탐사하는 조사원은 “그로 인한 심리적 효과는 엄청나다”고 쓴다. 모두가 출산에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은 ‘여성’만 출산에 완전히 묶일 일이 없다는 뜻이며,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남성’도 없다는 뜻이라고 말이다.
돌봄은 ‘국가’의 일이 되는 이 상상 속 세계를 현실에 적용하자면, 엄마의 돌봄노동에도 정당한 임금이 책정되고 주로 ‘여성의 일’로 단정 짓지 말아야 한다. 로펌에서 일하는 친구는 코로나19 이후 회의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인사말에 머리에 쥐가 난단다. “코로나가 빨리 끝나야지, 여자 변호사님들 다 너무 고생입니다.” 돌봄을 위한 재택근무를 장려한다고 했지만 그 대상을 거의 여성 변호사로 가정하는 현실이다.
‘뉴노멀’의 시대가 온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비대면 접촉과 소통이 일상화되고 있다.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고 있다. 이참에 ‘돌봄노동의 성별 분업’에 대한 생각도 전격적으로 바뀌면 좋겠다. 재난기본소득이 논의되는 것처럼, 긴급 재난돌봄휴가도 필요하다. ‘아빠의 긴급 재난돌봄휴가’를 강제하는 회사에 정부가 성평등 인센티브를 왕창 주면 어떨까. 종일 돌봄은 ‘당연히’ 여성과 엄마의 일로 치부돼 사회적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자각도 동반돼야 한다.
리담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