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탁현민의 말달리자
바야흐로 이미지의 시대다. 모호이너지(1895∼1946)는 ‘미래의 문맹은 문자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모르는 것’이라 했는데 그 미래의 시대가 이렇게 빨리 도래할 줄은 미처 몰랐다.
시대 변화에 가장 빠르게 적응하는 것은 자본이다. 어느 문화평론가의 말처럼 기업들은 더 이상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팔기 시작했다. 예컨대 “나이키는 절대 운동화 파는 회사가 아니다. 나이키는 이미 오래전부터 ‘열정’을 팔아왔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미지가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놓이는 시대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대화가 가능해진다. 소개팅 자리에 추리닝을 입고 모자 푹 눌러쓰고 나가는 것은 ‘이 자리에 정말 나오고 싶지 않았다’는 의사표시이며 초보적인 이미지 대화다. 프리미엄급 청바지를 입고 ‘닌텐도DS’를 만지작거리며 ‘커피빈’에 앉아 있는 여자의 외형만으로 생활 수준과 정서, 가치관과 지향까지를 읽어낼 수 있다면, 이미지 대화의 상급자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구질구질하게 “취미가 모에요?”, “돈 많이 버시나봐요?” 같은 질문은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상대의 패션과 소품, 분위기만으로도 상대의 의중을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미지 대화법의 핵심은 집요한 관찰과 연역적 사고다. 굳이 상대에게 물어볼 것 없이 -또 정작 궁금한 것은 언제나 물어보기 힘든 경우가 많으니- 상대를 면밀히 관찰하고 그것들을 단서로 사고한다면 기본적인 대화는 이미 나눈 것과 다름없다. 다만 명심할 것은 눌러쓴 모자 밑으로 그(혹은 그녀)를 스캔하는 동안 당신도 똑같이 스캔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절주절 쓸데없는 말 늘어놓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되는 세상이다.
탁현민 / 한양대 문화콘텐츠전공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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