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장동 축산업체 직원들이 쉬는 모습. 마장동 축산물시장은 최근 건물정비 등을 통해 좀더 깨끗한 곳으로 거듭났다. 탁기형 기자.
[매거진 Esc]마장동 새김꾼 김지삼의 18년 ③
지금은 전기충격기나 총 이용하지만 사람이 직접 잡던 시절도
지금은 전기충격기나 총 이용하지만 사람이 직접 잡던 시절도
스무살 무렵 처음 마장동에 왔을 땐 바로 근처에 도축장이 딸려 있었습니다. 사실 일하기는 그때가 더 편했습니다. 도축장에서 소·돼지를 잡으면 곧바로 받아다 손질을 하면 됐으니까요. 작업 동선이 짧았습니다. 그러나 마장동 도축장은 1998년께 도심 개발이 추진되면서 36년 만에 사라집니다. 당시 마장동·가락동·독산동에 도축장이 있었습니다. 마장동 도축장이 없어지면서 결과적으로 가락동·독산동 도축장으로 물량이 몰리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장동에선 도축은 하지 않고 산지에서 올라온 물량만 경매하는 도소매 기능만 담당합니다.
“고됐지만 근무 조건은 괜찮았어요”
도축장이 없어져서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80년대 초반 마장동은 항상 사람으로 미어터졌습니다. 요새 같은 세밑새해 ‘대목’엔 고기를 사러 온 사람들로 시장이 가득 찼습니다. 입구에서 바라보면 바글바글 사람들 뒤통수만 보였습니다. 도축장이 사라지고 수입 쇠고기가 많아진 요샌 외려 마장동이 죽은 편입니다.
지금은 돼지는 전기충격으로 도축하고 소 역시 총과 비슷한 기계로 잡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마장동 도축장에선 사람이 직접 소를 잡았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중노동이었습니다. 총으로도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최근에도 가끔 소머리 가운데 총 자국이 여럿 난 것이 눈에 띕니다. 몇 차례 실수했다는 뜻입니다. 비정한 말이지만, 한번에 잡는 게 소한테도, 사람한테도 좋은 일입니다.
부모님 고향은 서울이 아니었습니다. 쇠고기 쪽과 전혀 무관한 일을 하셨습니다. 마장동에서 일터를 찾은 건 그래서 우연입니다. 80년 겨울 먼 친척을 만나러 그가 일하는 마장동을 처음으로 찾았습니다. “고되지만 일할 만하다”는 그 친척의 말에 눌러앉게 됐습니다.
사실 처음엔 꺼려지는 측면이 더 많았습니다. 근처 도축장에서 소·돼지를 잡는다는 말이 들리고 시장에 걸린 소·돼지 고기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제가 조용하고 착한 편이라 성격에 맞을까 겁을 먹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생활이 되고 일이 됐습니다.
쇠고기 납품업체에서 일을 배웠습니다. 그때만 해도 쇠고기가 흔치 않았습니다. 고기를 사가는 손님들이 한정돼 있었습니다. 제가 일하던 납품업체는 백화점·예식장·골프장·식당으로 쇠고기를 납품했습니다. 뜬금없이 웬 예식장이냐고요? 당시 예식장 식당에서 결혼식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메뉴가 갈비탕처럼 몇가지로 정해져 있습니다. 지금처럼 특정 부위를 찾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당시엔 그저 쇠고기면 ‘최고’였습니다. 지금처럼 쇠고기가 많이 수입돼서 쇠고기를 흔히 먹는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쇠고기 등급제도 생기기 전이었습니다. 쇠고기 질이 높은지 낮은지는 사가는 사람들이 일일이 마블링(소 근육에 지방이 섞인 정도) 등을 보고 판단했습니다. 고된 일이었지만 당시 마장동이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80년까지도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은 한달에 고작 하루 쉬었습니다. 아주 괜찮은 회사일 경우 한달에 이틀을 쉬었습니다. 다들 그렇게 일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저는 마장동에 오기 직전 건축 관련 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마장동에서 받은 첫 월급이 직전 회사 월급보다 1.5배 높았습니다. 또 일주일에 하루는 도축장이 꼬박꼬박 쉬어서 납품업체도 덩달아 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의 직장처럼 마장동 업체들은 전부 주5일 근무제입니다. 소 사골을 사갔던 어느 손님의 항의
쇠고기를 다루려면 맛을 아는 게 기본이었습니다. 처음 입사하자마자 쇠고기를 부위별로 조금씩 떼서 전부 맛봤던 것도 기억납니다. 전 뭐니 뭐니 해도 등심이 제일 좋더군요. 작업하다 직접 치맛살을 육회로 살짝 떠서 먹던 맛도 좋았습니다.
마장동에서 오래 장사하다 보니 깐깐한 손님도 없지 않습니다. 대략 4∼5년 전으로 기억됩니다. 소 사골을 사갔던 한 손님이 솥째 들고 찾아왔습니다. 국물이 잘 우러나지 않는데 사골이 엉터리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언성 높이기 싫어서 원하는 대로 사골을 바꿔줬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그 손님이 가져온 사골을 우려 봤습니다. 웬걸, 국물이 뭉근하게 잘만 우러나더군요. 소 사골은 센 불에 끓여야 합니다. 그 손님은 아마 약한 불에 오래 끓여야 하는 걸로 착각한 모양입니다.
김지삼 부영축산 대표
정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쇠고기 납품업체에서 일을 배웠습니다. 그때만 해도 쇠고기가 흔치 않았습니다. 고기를 사가는 손님들이 한정돼 있었습니다. 제가 일하던 납품업체는 백화점·예식장·골프장·식당으로 쇠고기를 납품했습니다. 뜬금없이 웬 예식장이냐고요? 당시 예식장 식당에서 결혼식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메뉴가 갈비탕처럼 몇가지로 정해져 있습니다. 지금처럼 특정 부위를 찾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당시엔 그저 쇠고기면 ‘최고’였습니다. 지금처럼 쇠고기가 많이 수입돼서 쇠고기를 흔히 먹는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쇠고기 등급제도 생기기 전이었습니다. 쇠고기 질이 높은지 낮은지는 사가는 사람들이 일일이 마블링(소 근육에 지방이 섞인 정도) 등을 보고 판단했습니다. 고된 일이었지만 당시 마장동이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80년까지도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은 한달에 고작 하루 쉬었습니다. 아주 괜찮은 회사일 경우 한달에 이틀을 쉬었습니다. 다들 그렇게 일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저는 마장동에 오기 직전 건축 관련 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마장동에서 받은 첫 월급이 직전 회사 월급보다 1.5배 높았습니다. 또 일주일에 하루는 도축장이 꼬박꼬박 쉬어서 납품업체도 덩달아 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의 직장처럼 마장동 업체들은 전부 주5일 근무제입니다. 소 사골을 사갔던 어느 손님의 항의

마장동 새김꾼 김지삼의 18년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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