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밴드에서 인연을 맺은 전혜정(오른쪽)·권지용씨 부부가 함께 연주를 하고 있다.
“직업은 확실해야 한다”, “집 없는 남자와 결혼하면 고생한다”, “기 센 여자는 안 된다”, …. 결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 흔히 나오는 ‘어르신’들의 레퍼토리다. 정말 그럴까? 젊다고 크게 다르진 않다. 배우자를 찾는 남녀의 상당수는 학벌, 외모, 집안 환경과 경제력 등이 ‘어느 정도’는 돼야 한다는 기준이 있다. 이 기준을 통과한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걸까? 어느 정도 안정적 생활을 담보하는 기초는 될 수 있다. 하지만 꼭 행복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여기, 남들과 조금 다른 ‘기준’을 결혼에 적용한 세 부부가 있다. 돈 대신 취미가, 학벌 대신 취향이, 외모 대신 가치관이 맞는 사람을 배우자로 맞아 행복하게 사는 이들이다. 결국 부부의 삶을 평가하는 건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부부 자신 아니겠는가.
부부? ‘취생취사’!
스토리텔링 제작 스타트업 ‘미디어피쉬’의 전혜정(37) 대표와 권지용(36)씨 부부는 2004년 취미로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면서 처음 만났다. 전 대표의 동생이 만든 밴드에서 그는 드럼을, 권씨는 베이스를 쳤다. 음악이라는 공감대를 통해 친구로 5년을 지냈다. 그러다 밴드가 해체되면서 연락이 끊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전 대표와 함께 자취하던 남동생과 절친한 권씨가 집에 자주 놀러 왔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도 더욱 가까워졌다. 무엇보다도 취미와 가치관이 맞았다. 둘 다 음악뿐만 아니라 ‘원숭이섬의 비밀’ 같은 어드벤처 게임과 동물을 좋아했다. 게다가 권씨는 처음부터 전 대표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전 대표가 마음을 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귄 지 1주일 만에 제가 청혼했어요. 함께 성장해나갈 수 있다고 믿었어요.”
전 대표 부부는 지금도 여전히 같이 게임하고, 맥주를 마시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반면 서로의 사생활도 완벽하게 보장해준다. 스타트업 대표인 전씨와 개발자인 남편 둘 다 야근이 잦은데, 서로 “언제 들어오느냐, 어디냐” 전화를 하지 않는다. 가끔 메신저로 안부를 묻긴 하지만, 꼭 집에 들어와서 자야 한다는 철칙 같은 건 없다. 오히려 늦으면 “자고 들어오라”고 서로 메시지를 보낼 정도다. 전 대표는 이렇게 서로 신뢰하면서 ‘따로 또 같이’ 즐기는 생활에 100% 만족한다.
세계를 돌며 '한달에 한도시'씩 살아가는 김은덕(오른쪽)·백종민 부부가 이탈리아 베니치아에서 찍은 사진.
우리의 취향
<한 달에 한 도시>로 알려진 여행작가 김은덕(35)·백종민(36)씨 부부의 생활은 유목민에 가깝다. 25개월 동안 세계 25개 도시에서 한 달씩을 살았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지 2년 만인 오는 4월에 부부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넉 달 살아보기 여행을 또 떠난다.
이들은 영화제 스태프로 만났다. “일 때문에 오랜만에 전화를 하게 됐는데 갑자기 ‘이 사람이다’ 하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남자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고, 결혼 생각이 없던 여자의 마음도 이내 흔들렸다. “남편 집에서 <한겨레>를 보더라고요. 적어도 저랑 생각이 같겠구나 하고 안도가 됐어요.” 그렇게 2년을 연애해 결혼까지 이르렀다.
취향과 가치관을 공유한 이들의 결혼식은 남달랐다. 2012년 5월 한 음식점을 빌려 ‘작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선언문에선 ‘양쪽이 평등한 관계로 살아가겠다’, ‘성공보다는 개인의 행복에 가치를 두겠다’ 등의 열 가지 약속을 했다. 거기엔 이런 약속도 있었다. ‘세계여행의 꿈을 실현해 아르헨티나로 떠나 1인분에 1㎏이라는 소고기를 맘껏 먹겠다.’
5년 뒤로 생각했던 세계여행 계획은 홍콩, 런던, 터키를 거친 배낭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1년 뒤로 바뀌었다. 함께 하는 여행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다. 부부는 직장을 관두고 열 달 동안 여행을 준비했다. 어학공부를 하고, 철저하게 계획을 짰다. ‘한 달에 한 도시’씩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여행경비는 서울 합정동의 신혼집 전세 보증금을 빼 마련했다.
“정말 한시도 안 떨어져 2년 동안을 살았으니 시간으로 따지면 맞벌이 부부가 15년 동안 산 시간하고 같더라고요. 그 시간을 거치면서 누구보다 좋은 친구가 된 것 같아요. 결혼이라는 게 결국은 사람이 같이 사는 거지, 상품을 만드는 건 아니잖아요?” 부부가 마주 보고 활짝 웃었다.
집 없이 버스를 개조해 사는 최현호씨의 아내 서정현씨와 딸 희정.
버스서 살아도 둘이 좋으면 그만
최현호(38)·서정현(31)씨 부부의 집은 버스다. 2012년 결혼을 앞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집 없이 살기로 결정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왜 굳이 그 돈을 집에 투자해야 되나” 싶어서였다. 서울 강남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했던 최씨는 그때 만난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껴 부동산에 목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다들 신기루를 좇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최씨의 생각에 아내도 동의했다. 2년여 동안 누나 집에 살다 경매로 8천만원에 45인승 관광버스를 사, 8500만원을 들여 캠핑카로 개조했다. 방방곡곡을 여행하며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엌, 화장실, 침실 등 집이 갖춰야 할 요소도 다 마련했다. 이름은 ‘산이’로 붙였다.
지난해 2월 딸 희정이를 얻은 뒤 바로 전국일주가 시작됐다. 일단 대형버스를 세워둘 주차장이 있는 곳이어야 했다. 큰 해수욕장이나 항구, 낚시터가 그런 데다. 충남 태안·보령 등 서해를 누볐다. 오대산과 동해 쪽도 찾았다. 그의 블로그 ‘한량일기’에는 충남 서천 홍원항에서 주꾸미 잡아먹고, 태안에서 도루묵 잡아먹는 ‘동가숙 서가식’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방랑객 같은 삶에 반대하던 양가 부모님도 몇 차례 캠핑을 함께 한 뒤로는 자식들의 선택을 받아들이게 됐다.
“행복은 환경이더라고요. 캠핑 가면 이런저런 가장들을 많이 만나요. 분명 저 사람도 직장이나 집에선 무서운 상사, 과묵한 아빠일 텐데 나오면 전부 살갑게 바뀌거든요. 저도 버스 생활 하면서 더 가정적으로 바뀌었어요. 여보야가 너무 좋아해요.” 웃느라 눈이 없어진 최씨의 얼굴에서 행복이 보였다. 글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사진 각 부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