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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 듯 다른 아시아의 위대한 ‘야구 개척자들’

등록 2015-01-19 10:27수정 2015-01-19 13:37

왼쪽부터 박찬호와 노모 히데오 / 한겨레 자료사진
왼쪽부터 박찬호와 노모 히데오 / 한겨레 자료사진
김동훈 기자의 ‘스포츠 맞수 열전’ ②
박찬호 vs 노모 히데오
박찬호(42)와 노모 히데오(47).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다른 것 같지만 묘하게 닮은 점이 많은 메이저리그 아시아 1세대 투수들이다.

두 사람에게 새해 벽두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현역 시절 아시아 투수 최다승을 놓고 치열한 자존심 대결을 펼쳤던 두 사람에게 미국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18일 ‘야구 개척자(Pioneers of Baseball)’ 상을 수여한다는 소식이다.

둘은 똑같이 LA 다저스에서 데뷔해 한때 다저스의 원투 펀치로 활약했고, 아시아 출신 메이저리그 최다승 1, 2위 기록을 남겼다. 메이저리그 통산 성적은 박찬호가 124승 98패 평균자책점 4.36, 노모가 123승 109패 평균자책점 4.24를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통산 등판 경기 수는 박찬호가 17시즌 동안 476경기, 노모가 12시즌 동안 323경기에 나섰다. 선발로는 노모가 318경기, 박찬호가 287경기로 노모가 31경기 더 등판했다.

박찬호는 노모보다 다섯 살 적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데뷔는 오히려 1년 빨랐다. 1994년 메이저 리그 역사상 17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선수로 기록됐다.

노모는 이미 일본에서 정상급 투수로 발돋움한 반면 박찬호는 대학 재학중에 신데렐라처럼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이 때문에 노모는 일본에서 이미 완성된 ’메이드 인 재팬’이고, 박찬호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노모는 일본에서 데뷔 첫해인 90년 시즌 최다승인 18승과 2.91의 평균자책점, 287탈삼진, 6할9푼2리의 최고 승률을 기록하면서 신인상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또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사와무라상, 일본 프로스포츠 대상 등 각종 상을 휩쓸면서 데뷔 시즌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데뷔 시즌부터 4년 연속 17승 이상을 기록했고, 일본에서 뛴 다섯시즌 동안 한해 평균 15승이 넘는 78승을 거뒀다.

반면 박찬호는 대학 2학년 때까지 야구인들 사이에서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있다는 정도로 알려졌을 뿐 일반 팬들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 선수였다.

 

다저스에서 똑같이 16번을 원했던 두 선수

두 선수의 메이저리그 데뷔 과정은 대조적이었다. 박찬호는 1994년 4월8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전에서 9회에 구원으로 등판해 역사적인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하지만 1이닝 동안 6타자를 상대하면서 안타 1개와 볼넷 4개로 2실점했고, 엿새 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5회부터 3이닝을 던졌는데 홈런 1개를 포함해 안타 4개와 볼넷 3개를 허용하면서 3실점했다. 박찬호는 이 경기 뒤 메이저리거가 된 지 불과 17일 만에 마이너리그 더블A팀으로 내려갔다.

박찬호가 마이너리그에서 2년차를 맞고 있던 1995년, 노모는 박찬호 선수와 같은 팀인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일본프로야구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입단하는 것은 지금은 흔한 일이 됐지만, 당시 노모는 1964년 무라카미 마사노리 이후 무려 30년 만에 나온 일본인 메이저리거였다.

박찬호 / AP=연합뉴스
박찬호 / AP=연합뉴스
노모는 다저스에 입단하자마자 선발 자리를 꿰찼다. 꽈배기처럼 몸을 꼬며 타자에게 등을 보이는 독특한 스타일의 투구폼과 낙차 큰 포크볼로 눈길을 끌었다. 노모는 그해 13승 6패, 2.54의 좋은 성적으 신인상을 수상하며 태평을 건너 일본과 미국 무대에서 연거푸 신인상을 받은 최초의 선수가 됐다.

둘의 묘한 인연은 등번호부터 시작됐다. 다저스에 입단했을 때 박찬호와 노모 모두 16번을 달고싶어 했다. 그런데 박찬호가 입단한 1994년 당시 다저스에는 론 페로나스키라는 투수 코치가 이미 16번을 달고 있었다. 노장 코치의 등번호를 빼앗을 수 없었던 박찬호는 대신 16번을 거꾸로 한 61번을 달게 됐다.

그런데 이듬해 노모가 입단해서 역시 16번을 원했는데, 마침 페로나스키 투수 코치가 샌프란시스코로 이적하면서 16번이 비어 있었고 노모는 무주공산이 된 16번을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둘은 LA 다저스 시절 클럽하우스에서 바로 옆 라커를 썼다. 자연히 서로를 유심히 관찰할 수 있는 위치였다. 노모는 1995년 입단 첫해부터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차지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박찬호는 94년과 95년 대부분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냈다. 노모 곁에는 늘 미모의 리포터들이 인터뷰를 했지만 박찬호 곁에는 중년의 남자 기자들 뿐이었다. 박찬호는 훗날 “그런 노모가 부러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노모는 미모의 일본 TV앵커와 심심치않게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고, 메이저리그 생활을 하는 동안 항상 통역을 대동하고 다니며 언론과의 직접 접촉을 피해 일본 기자들 사이에 냉정하기로 유명했다. 반면 박찬호는 한국 기자들 몇몇과는 상당히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같은 듯 다른 투구 스타일

두 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동안 똑같이 7개 팀을 거쳤다. 박찬호는 다저스에 이어 텍사스 레인저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뉴욕 메츠, 뉴욕 양키스, 필라델피아 필리스,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17년을 뛰었다. 노모는 다저스에 이어 뉴욕 메츠, 밀워키 브루어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보스턴 레드삭스,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 캔자스시티 로열스까지 역시 7개 팀에서 12시즌을 뛰었다. 일본 프로야구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5시즌을 뛰고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것을 감안하면 노모 역시 박찬호와 똑같은 17시즌이다. 물론 박찬호는 나중에 일본과 한국 프로야구에서 3시즌을 더 뛰었다.

둘은 다저스에서 3년 반 동안 한솥밥을 먹은 것을 제외하면 언제나 다른 팀에 있었지만 묘하게도 메이저리그에서 선발 맞대결을 펼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한일 투수 맞대결에선 박찬호가 3승을 거둔 반면, 노모는 1패만 기록햇다. 지난해까지 한일 선발 맞대결은 딱 9번 밖에 없었는데, 박찬호는 LA 다저스 시절이던 2000년 4월5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전에서 이라부 히데키와, 또 그해 7월21일과 26일 콜로라도 로키스전에서 요시이 마사토와 두번 연속 만나는 등 일본인 투수와 모두 세번 맞대결을 벌여 세번 모두 이겼다.

반면 노모는 다저스에 복귀했던 2004년 5월3일 몬트리올 소속의 김선우와 맞붙어 5이닝 3실점으로 비교적 잘 던지고도 패전투수가 됐고, 김선우는 5이닝 2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둘의 라이벌 의식은 언제 싹텄을까. 1990년대 중후반 다저스에서 한솥밥을 먹을 때부터다. 둘은 같은 동양인으로 늘 비교 대상이 됐고 97년 나란히 14승을 거두며 팀내 다승 공동 1위를 차지하면서 보이지 않는 경쟁을 펼쳤다. 이후 동양인 통산 최다승을 놓고 노모가 달아나면 박찬호가 쫓아가면서 라이벌 관계가 절정에 달했다.

두 선수는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로 서로 갈라져 있을 때가 많았는데, 99년 노모가 밀워키로 이적하고 박찬호가 다저스에 남아 있었을 때 같은 내셔널리그에서 노모가 12승, 박찬호가 13승을 거두며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하지만 그때도 맞대결은 성사되지 못했다.

둘의 투구 스타일 역시 같은 듯하면서도 달랐다. 먼저 둘의 공통점은 공은 빠르지만 사실은 제구력이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노모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공은 빠르지만 제구력이 좋지 않아서 여러 학교로부터 외면을 받은 끝에 고향인 오사카 지역의 세이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박찬호 역시 강속구에 견줘 컨트롤이 들쭉날쭉해서 공주고등학교 시절 투수보다는 3루수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제구를 가다듬자 보석이 됐다.

두 투수 모두 땅볼 투수가 아니라 뜬공 투수라는 점도 닮았다. 즉, 맞춰잡는 피칭이 아니라 타자를 힘으로 압도하는 삼진형 투수였던 것이다.

투구폼 역시 독특했는데, 노모는 이른바 몸을 비비꼬는 ‘토네이도 투구법’으로 유명했고,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초기에 자신의 우상이었던 놀란 라이언을 따라 이른바 ‘하이킥 투구폼’을 구사하기도 했다. 노모의 주무기는 강력한 포크볼이었고, 박찬호는 라이징 패스트볼과 커브볼이 위력적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선수가 서로의 구위를 매우 부러워했다는 점이다.

두 선수가 야구선수로서 자존심 대결을 펼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친근한 사이였다. 노모가 다저스를 떠난 뒤 박찬호는 “노모 선수의 빈 라커가 너무나 허전하다”라며 아쉬워했다고 했고, 박찬호가 한국에서 장학회를 만들었을 때 노모가 일본에서 일부러 귀국해 박찬호의 장학사업을 돕기도 했다. 박찬호는 기자들에게 틈만 나면 노모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칭찬했다.

 

찬호와 노모가 일군 불멸의 기록들

두 투수는 메이저리그에 위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그 중에서 둘이 자존심을 걸고 다퉜던 아시아 선수 역대 최다승의 승자는 결국 박찬호였다.

노모가 도망가면 박찬호가 쫓아가는 양상이 전개되다가 결국 노모가 통산 123승을 거두고 2006년 은퇴했다. 그때 박찬호는 113승으로 10승이나 부족했다. 게다가 박찬호는 그 이듬해(2007년) 1승도 거두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걸었다. 나이도 서른다섯에 접어들었고, 보직도 불펜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박찬호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세 시즌 동안 불펜에서 11승을 보태면서 124승으로 끝내 노모를 뛰어넘어 아시아 선수 역대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

노모 히데오 / AP=연합뉴스
노모 히데오 / AP=연합뉴스
박찬호의 승리는 극적이었다. 박찬호는 2009년 시즌을 마쳤을 때 노모의 123승에 3승이 모자란 120승을 기록중이었다. 하지만 나이는 들고 구위는 떨어졌다. 메이저리거로 계속 남을 수 있을 지조차 매우 불투명했다. 다행히 2010년 시즌 연봉 120만 달러를 받고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다. 양키스에서 불펜 투수로 전반기에 2승을 거뒀기에 통산 122승으로 이제 노모 선수의 기록에 1승 차로 다가섰다. 하지만 그의 활약은 기대 이하였고, 결국 그해 7월 31일 양키스에서 방출됐다.

그리고 나흘 뒤인 2010년 8월 4일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팀인 피츠버그가 극적으로 박찬호를 영입했다. 어느덧 시즌은 9월로 접어들었지만 박찬호는 좀처럼 승수를 보태지 못했다. 이후 박찬호는 9월 13일 승리투수가 되면서 통산 123승으로 노모와 타이를 이뤘다. 이제 남은 경기는 세 경기. 10월 2일,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서 3-1로 앞서던 5회, 존 러셀 감독이 갑자기 호투하던 선발 다니엘 매커친을 내리고 박찬호를 올렸다. 러셀 감독은 박찬호의 통산 124승 의미를 알고 있었다. 박찬호는 러셀 감독의 배려에 보답이라도 하듯 3이닝 동안 삼진을 6개나 잡아내며 124승을 달성했다.

박찬호가 노모와의 자존심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한 기록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이다. 박찬호는 2000년 18승을 기록하며 96년 노모가 가지고 있던 16승을 넘어,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 노모는 이후 2002년과 2003년 연거푸 16승을 기록했지만 박찬호 선수의 18승에는 미치지 못했다.

박찬호의 한 시즌 18승은 2006년과 2007년 대만 출신의 왕첸밍이 19승을 연거푸 기록하기 전까지 6년 동안 아시아 선수 최고 기록으로 남았다.

하지만 박찬호에겐 유독 불명예 기록도 많다. 대표적인 게 ‘한만두’. 한이닝 만루홈런 2개를 맞았는데, 한 경기도 아니고 한 이닝에 그것도 같은 타자에게 맞았으니 너무나 희귀한 기록이고 야구 역사에 또다시 나오기 어려운 희한한 기록이다.

1999년 4월24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였다. 2-0으로 앞서던 3회초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연타석 만루 홈런을 맞는 등 3회초에만 11실점하고 말았다. 타티스는 한 이닝에 같은 투수에게 만루홈런 2개를 치면서 8타점을 기록하는 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박찬호는 또 메이저리그 역사상 한 시즌 최다홈런 신기록을 세웠던 배리 본즈 기록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당시 배리 본즈는 마크 맥과이어가 세웠던 한 시즌 최다 홈런 70개와 타이를 이룬 상태였는데, 2001년 10월6일 샌프란시스코의 홈구장 AT&T 파크에서 열린 경기에서 박찬호를 상대로 71호와 72호 홈런을 연거푸 터뜨리며 대기록을 세웠다.

박찬호와의 경쟁에선 자존심이 상했을지 모르지만 노모는 불멸의 기록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우선 1995년 아시아 선수 최초로 내셔널리그 신인상을 수상했고, 그해 아시아 선수 최초의 올스타전 선발투수라는 영예도 안았다. 특히 아시아 선수 최초는 물론 메이저리그 140년 역사상 양대리그에서 모두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1996년, 내셔널리그 소속의 다저스 시절 ‘투수들의 무덤’이라는 쿠어스필드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여러 팀을 떠돌면서 저니맨 생활을 하던 2001년, 아메리칸리그 팀인 보스턴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고 시즌 데뷔전에서 또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양대리그 노히트노런 기록은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도 전설의 투수 싸이 영, 짐 버닝, 놀란 라이언에 이어 노모가 역사상 네 번째 기록이다. 나중에 랜디 존슨이 다섯 번째로 합류했으니 메이저리그를 빛낸 쟁쟁한 선수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박찬호와 노모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는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의 지표인 한 시즌 200이닝 달성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노모는 네 차례(96년, 97년, 2002년, 2003년)나 200이닝 이상을 던졌고, 98년, 2000년, 2001년 등 세 차례 200이닝 이상을 달성한 박찬호는 2001년 234이닝을 던지며 아시아 투수 한 시즌 최다 이닝 기록을 세웠다.

박찬호와 노모는 18일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버드 셀리그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의 이임식에서 나란히 야구 개척자상을 받는다. 하지만 노모는 참석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불참 사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신 박찬호와 노모를 잇따라 영입해서 ‘아시아 출신 열풍’을 일으킨 피터 오말리 전 LA 다저스 구단주가 대리 수상하게 된다.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며 메이저리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박찬호와 노모. 그들은 진정 위대한 아시아의 야구 개척자들이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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