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파트 재개발 공사 현장에 사는 고양이 뭉툭이. 이곳의 고양이들을 돌보는 캣맘들을 밤마다 쫓아다니며 바라본다. 뭉툭이의 눈빛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3층 높이 철제 담장으로 막아 놓은 어느 재개발 아파트 단지 안, 사람은 떠났고 길고양이는 남아 있다. 일주일에 한두개씩 동이 사라지며 초등학교 운동장 크기의 공터가 생긴다. 풍경이 바뀐다. 지켜야 할 영역도 흔적 없이 무너지고, 숨거나 쉴 수 있는 공간도 길고양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먹을 것도 없다. 사람이 버리는 쓰레기가 줄고, 쥐도 사람 따라 떠났으니까.
그런 길고양이를 위해 매일 아파트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몇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이. 오로지 아이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늘도 늦은 오후의 볕을 친구 삼아 아파트로 들어간다.
고철만 쌓여 있는 공터 옆 급식소에 스티로폼으로 집을 만들어 놓아준다. ‘코점이’에게 있던 쌀 한 톨 크기의 상처가 하루 사이에 밤톨만큼 커져 곪아 있었다. 가까이 오지 못하고 주변만 맴도는 아이를 기어코 붙잡아 닦아주고 약을 발라준다. 상처가 너무 깊고 심하다. 그날 밤에는 ‘턱시도’를 구조해서 병원에서 치료를 해주었다. 20㎏이 넘는 사료와 수십개의 캔 그리고 물 수십통을 단지 내 고양이들에게 나눠주고 나서 말이다. 치료를 마친 턱시도가 돌아갈 곳은 다시 아파트밖에 없다.
이곳에서 고양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조합장과 건설사의 배려로 담장 아래 고양이 통로를 뚫어주는 정도가 전부다. 그리고 이 아이들을 돌보는 캣맘 세 명이 할 수 있는 것은 밥을 주는 일밖에 없다. 그것도 몸을 축내면서 해야 겨우 다 할 수 있다. 동마다 한두 명씩 있었던 캣맘들은 최근 2주 사이 모두 경황없이 떠나버렸다. 재개발 혹은 재건축이라는 대규모 건설사업에서 길고양이를 위한 배려는 지금까지 없었다. 또 없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 지난날의 당연함이 점점 불편함이 되어 우리에게 오고 있다.
사람들이 들어가면 단지 가운데 상가 앞에 앉아 있던 ‘뭉툭이’가 움직인다. 아주 느릿한 속도로. 동선을 다 꿰뚫고 있어 다니는 길목에서 동상처럼 지켜본다. 밥을 먹을 때는 까치와 나눠 먹고, 캔을 주면 경계심 높고 겁 많은 ‘번개’에게 슬쩍 양보한다. 해가 저물면 재개발 아파트 공사장에는 가로등 하나 없어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는다. 뭉툭이는 캣맘들이 손전등에 의지해 20개 넘는 급식소에 밥과 물을 넣어줄 때, 딱 보일 만큼 거리를 두고 따라다니며 앉았다 서기를 반복하며 지켜본다. 턱시도를 구조할 때도 그렇게 멀찍이서 바라봤다.
뭉툭이는 왜 그럴까? 그냥 사람이 그리워서, 밥 주니 고마워서, 아니면 영역을 지키려는 본능적인 마음으로? 그런데 뭉툭이의 눈빛은 내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를 어떻게 할 거냐고, 이대로 사라져도 괜찮냐고 묻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대답할 차례다. 길 위 생명들의 죽음 위로 사람들의 새로운 삶을 위한 공간을 세우는 일이 옳은 것인지.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오늘도 아파트는 무너지고 있다. 그곳에는 길고양이가 있다.
글·사진 김하연 길고양이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