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에 까만 털이 난 고양이 훈이. 가수 나훈아의 턱수염과 비슷한 모양이라 훈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이름은 훈이. 입 아래 턱수염처럼 난 털이 가수 나훈아와 비슷해서 그렇게 지었다. 훈이는 어느 해 봄, 건물 주차장 옆 작은 지붕 위에서 태어났다. 훈이를 포함해서 모두 여섯이 형제였다. 그러다가 엄마가 새끼들을 품 안에 넣고 돌보고 있을 무렵 아이 둘이 사라졌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곳에서 지냈던 터라 사람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훈이 엄마는 아이들이 발도리를 시작했을 정도로 컸을 무렵 내게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스스럼없이 보여주었다.
엄마와 인연이 된 것도 6년이 되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면서 엄마가 날 믿었기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 같았다. 그런데 데리고 온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맡기고 갔다. 어느 날 엄마는 아이들 옆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훈이와 인연은 시작되었다. 다른 형제들이 두려움에 앞으로 나서지 않고 불안해하며 망설이고 있을 때, 내 앞으로 가장 가까이 다가온 아이가 훈이였다. 오토바이 소리만 나면 달려 나와 내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비닐봉지에 손을 집에 넣으면 모든 동작을 멈추고 눈에서 뭐가 나올 것 같이 손을 뚫어지게 볼 만큼 식탐이 있었다. 다른 형제들이 뒤에서 머뭇거릴 때 가장 앞에 앉아서 닭가슴살을 얻기 전까지는 사료에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내 손만 바라보는 아이였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기다림이 길어지면 바닥에 누워서 뒹굴뒹굴거리고 기지개도 폈다가 ‘똥꼬발랄’한 자세로 그루밍도 하다가 저렇게 손을 뻗는 시늉까지 한다. 닭가슴살을 안 줄 수가 없다. 안 준다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느낌이 든다.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는지는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훈이를 위한 닭가슴살 하나는 꼭 남겨 놓는다.
훈이가 사람을 보는 눈은 여느 길고양이처럼 경계로 가득 차 있지 않다. 사람의 온화한 손길을 아는 그의 눈빛은 집고양이만큼 친근하다.
이렇게 믿어야 한다면 믿고, 의지할 수 있다면 의지하는 것이 적극적인 삶의 태도임을 몸으로 보여주는 아이가 훈이다. 사실 주차장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은 나 뿐이 아니다. 다른 두 가지의 사료가 각기 다른 장소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두 명 정도 더 있을 것 같다. 아마도 나를 비롯해서 그 두 분의 호의가 쌓여서 훈이의 눈빛이 집고양이에 버금가도록 친근하게 변했을 것이다.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두 사람보다는 세 사람의 호의가 길 위에 쌓이면 길고양이는 살만해지고 눈빛도 변하는 것이다. 길고양이가 살만하다면 사람도 그만큼 살만해지는 것이다.
훈이가 자신만의 영역을 찾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내미는 손을 꽉 잡아줄 것이다. 닭가슴살도 주고 똥도 부지런히 치우면서 말이다. 저런 눈빛을 내게 선물한다면 그 정도 수고는 수고도 아니다. 멀리 보지 말고 자신의 발 아래를 조금만 둘러보자. 우리 주변에는 많은 훈이들이 어제도 오늘도 당연히 내일도 나와 당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살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서. 부디 그 손을 뿌리치지 않고 한 번 정도만이라도 잡아주면 좋겠다.
김하연 길고양이 사진가
훈이가 어서 닭가슴살을 내놓으라는 듯 뒹굴거리며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