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카스트로와 우고 차베스는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바람을 주도하고 있는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상징이다.
카스트로·차베스·모랄레스
어깨 겯고 ‘선의 축’ 만들다
미국 맞서 40여년 사회주의 고집 뚝심
이념의 연대 속에 혁명을 수출하다
게바라의 꿈, 현실과 만나는가
어깨 겯고 ‘선의 축’ 만들다
미국 맞서 40여년 사회주의 고집 뚝심
이념의 연대 속에 혁명을 수출하다
게바라의 꿈, 현실과 만나는가
현장속 현장ㅣ유재현의 쿠바 탐방기/④ 제2, 제3의 쿠바들
아바나를 떠나기 이틀 전 볼리비아 사회주의행동당(MAS)의 에보 모랄레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다음날 쿠바 국영 텔레비전은 음성뿐이긴 했지만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대통령당선자인 모랄레스를 생중계로 연결했다. 모랄레스와의 특별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집주인이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낮은 저음으로 한 말을 기억한다. 비바 카스트로. 비바 차베스. 비바 모랄레스.
아바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포스터 중에는 노구의 피델 카스트로와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인 젊은 우고 차베스(Hugo Chavez)를 등장인물로 기용한 것이 드물지 않다. 아바나의 한 국영배급소 뒤편에 붙어 있던 ‘우리들의 아메리카, 중단 없는 변화(Nuestra America, Cambio Para Siempre)’란 문구를 적은 포스터도 그 중의 하나였다. 상대방의 팔뚝을 부서져라 움켜쥐고 있는 사진에서는 공교롭게도 키가 큰 카스트로를 작은 차베스가 살짝 올려보고 있어 영 부조화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뒤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아바나를 찾고 있는 차베스는 자타가 인정하는 카스트로주의자이다. 이 포스터의 사진이 스승과 제자의 기념촬영이라는 느낌이 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볼리비아의 대통령당선자인 모랄레스가 카스트로에 대해 그만큼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선 후 가장 먼저 아바나를 찾았고 뒤이어 7개국 순방의 첫 나라를 베네수엘라로 선택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모랄레스의 발언은 제2의 베네수엘라가 되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차베스는 모랄레스를 만난 자리에서 일컬어 이 세 나라를 ‘악의 축인 미국에 맞서는 선의 축’으로 정의했고 모랄레스는 맞장구를 쳤다. ‘모랄레스는 차베스가 아니다’라는 희망 섞인 관측도 있었지만 모랄레스는 그 기대에 부응하는 대신 베네수엘라와 쿠바를 향해 첫 걸음을 뗀 것으로 보인다.
약한 룰라, 강한 차베스
이른바 좌파 바람이 부는 라틴아메리카의 바람에도 차이는 있다. 브라질의 룰라로 대변되는 모호하고 유약한 좌파가 있는 반면 차베스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좌파가 있다. 리트머스 시험지는 미국과 신자유주의이다. 룰라가 반미노선을 노골적으로 표방하기를 꺼려하는 반면 공약으로 내걸었던 토지개혁 등을 번복하고 외교·경제정책에 있어 신자유주의에 대한 타협적 태도를 노골화해왔던 것에 반해 차베스는 미국을 제국주의를 규정한 것은 물론 석유자원의 국유화 지향과 의료, 교육 등의 사회복지에 있어 사회주의적 개혁 노선을 표방하고 실천해 왔다. 이 바람을 나누는 또 하나의 바로미터가 쿠바이다. 룰라와 차베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쿠바에 대한 태도가 라틴아메리카의 이른바 좌파정권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냉엄한 국제관계에 있어서 줄 것이라고는 사람 밖에 없는 국가가 차지한 위치로는 기이할 정도인데 이것은 지난 40여년간 코 앞의 초강대국의 핍박과 맞서며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사회주의를 지켜온 나라로서 가지는 이념적 지도성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차베스에 대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쿠바인들의 속내에는 자신들의 사회주의가 다른 나라의 전범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배어 있다. 그러나 가장 감개가 무량한 인물은 아마도 미국의 앞마당에서 40여 년 이상을 고집스러운 사회주의 혁명가를 자처해 왔던 피델 카스트로와 볼리비아의 밀림에서 쿠바의 산타클라라로 옮겨진 체게바라의 뼈일 것이다.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가끔씩 지켜봤던 텔레비전에서는 마침 쿠바의 앙골라 내전 참전 30주년 기념프로그램이 연이어 방영되고 있었다. 모랄레스의 당선과 앙골라 내전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사건은 체게바라를 떠올리게 했다.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꿈꾼 체게바라가 콩고에 뒤이어 ‘승리할 때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란 말을 남기고 떠난 곳은 볼리비아의 밀림이었다. 11개월 뒤 볼리비아는 체 게바라의 심장에 총알을 박는 것으로 화답했다. 체 게바라의 죽음 이후에도 쿠바는 혁명의 수출을 공공연하게 주장했고 1976년부터 1988년까지의 앙골라 내전에의 참전은 앙골라 사회주의 혁명의 수호가 그 명분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0년 동구권과 소련이 연이어 침몰한 후 곧장 붕괴위기로 내몰린 쿠바에게 라틴아메리카이건 세계이건 혁명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쿠바혁명조차 위기에 내몰렸던 것이다. 2005년 앙골라 참전 30주년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극적인 반전을 상징하고 있다. 1990년대 쿠바가 직면한 위기는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는 고립무원의 위기였다. 혁명의 수출은 커녕 혁명의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쿠바에게 1999년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선거에서 우고 차베스가 당선된 것은 극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2000년대 쿠바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베네수엘라와의 무역협정으로 가능해진 원유의 공급에 힘입은 바가 크다. 94년 일일 2만배럴의 생산량을 2004년 7만5천배럴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필요량의 50퍼센트를 수입에 의존해야하는 쿠바에게 베네수엘라의 원유공급은 가뭄의 단비를 넘어선 것이었다. 쿠바 의사 2만명 베네수엘라로 군부의 쿠데타와 신임투표의 파고를 헤쳐 나가야 했던 차베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베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그가 공언했던 사회주의적 개혁이 부딪혀야 했던 난공불락의 벽이었다. 빈민을 정치적 기반으로 했던 그가 약속했던 의료와 교육의 개혁은 지배계층의 편에 서 있던 의사와 선생들의 저항으로 무산의 지경에 이르러야 했다. 2000년 쿠바와의 자유무역협정은 극적인 활로를 열었다. 쿠바에 원유를 공급한 대금의 일부로 베네수엘라에 쏟아져 들어온 2만여명의 쿠바 의사들은 베네수엘라의 의사들이 가기를 거부했던 빈민들의 산동네를 점령했다. 10만명의 교사 자원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 쿠바의 교사들이 투입되었고 교육받은 자원자들은 빈민과 농민의 주거지역에서 성인문맹퇴치에 나서고 있다. 쿠바의 교육프로그램인 ‘나는 할 수 있다(Si se puede)' 또한 베네수엘라에서 제 몫을 해내고 있다. 오가노포니코와 같은 농업개혁 또한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이미 응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양국 간의 관계가 우호적인 국가 간 협력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아바나대학에서 만난 한 철학·사회과학과 교수는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관계를 ‘사회주의와 국제주의에 기초한 관계’로 표현했다. 양국 간의 관계를 국가 간 협력을 넘어 이념적 연대에 기초한 것으로 보는 이런 관점은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이 베네수엘라가 아닌 라틴아메리카 전체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아옌데가 못한 것을 해내다 원유를 가진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의료부문과 교육부문의 자원을 가진 쿠바의 국가간 협력모델은 천연가스를 가진 볼리비아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재현될 것이고 농축산의 칠레, 광물의 페루 등의 나라들에 좌파정권이 들어서고 유지되는 데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국이 우려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협력관계는 우후죽순으로 번지는 라틴아메리카의 좌경화에 탄력을 불어넣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미국의 앞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반의 바람이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사회주의정권이 넘지 못했던 벽을 넘어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불고 있다는 것이다. 알카(ALCA, FTAA, 미주자유무역지대)와 알바(ALBA, 미주대륙을 위한 볼리바르 대안)는 그 대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뒤이어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알카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저조한 참여로 성사가 불투명한 상태로 답보를 거듭하고 있다. 반면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앞장서 목청을 돋우는 알바는 점차 역내 국가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얻어가고 있다.
미국은 자신의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반역을 주도하는 쿠바와 베네수엘라를 ‘전복의 축’으로 비난하고 있지만 그것은 비난일랄 것도 없이 현실의 위기의식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라틴아메리카에 부는 새로운 바람에 쿠바는 이념적 지주 역할뿐 아니라 현실적 협력관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체 게바라의 꿈이 티셔츠에서 벗어나 라틴아메리카의 땅에 입을 맞추게 될지 누구도 쉽게 예단할 수 없지만 그의 죽음 이후 그 꿈이 가장 현실에 가까이 근접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 중심에 체 게바라가 제2의 조국으로 삼았던 쿠바가 있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다 목숨을 잃은 돈키호테의 살아남은 판초가 새로운 돈키호테들이 기지개를 펴는 모습을 보고 있다. 풍차의 날개는 벌써부터 멀쩡하지 않다.
이른바 좌파 바람이 부는 라틴아메리카의 바람에도 차이는 있다. 브라질의 룰라로 대변되는 모호하고 유약한 좌파가 있는 반면 차베스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좌파가 있다. 리트머스 시험지는 미국과 신자유주의이다. 룰라가 반미노선을 노골적으로 표방하기를 꺼려하는 반면 공약으로 내걸었던 토지개혁 등을 번복하고 외교·경제정책에 있어 신자유주의에 대한 타협적 태도를 노골화해왔던 것에 반해 차베스는 미국을 제국주의를 규정한 것은 물론 석유자원의 국유화 지향과 의료, 교육 등의 사회복지에 있어 사회주의적 개혁 노선을 표방하고 실천해 왔다. 이 바람을 나누는 또 하나의 바로미터가 쿠바이다. 룰라와 차베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쿠바에 대한 태도가 라틴아메리카의 이른바 좌파정권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냉엄한 국제관계에 있어서 줄 것이라고는 사람 밖에 없는 국가가 차지한 위치로는 기이할 정도인데 이것은 지난 40여년간 코 앞의 초강대국의 핍박과 맞서며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사회주의를 지켜온 나라로서 가지는 이념적 지도성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차베스에 대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쿠바인들의 속내에는 자신들의 사회주의가 다른 나라의 전범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배어 있다. 그러나 가장 감개가 무량한 인물은 아마도 미국의 앞마당에서 40여 년 이상을 고집스러운 사회주의 혁명가를 자처해 왔던 피델 카스트로와 볼리비아의 밀림에서 쿠바의 산타클라라로 옮겨진 체게바라의 뼈일 것이다.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가끔씩 지켜봤던 텔레비전에서는 마침 쿠바의 앙골라 내전 참전 30주년 기념프로그램이 연이어 방영되고 있었다. 모랄레스의 당선과 앙골라 내전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사건은 체게바라를 떠올리게 했다.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꿈꾼 체게바라가 콩고에 뒤이어 ‘승리할 때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란 말을 남기고 떠난 곳은 볼리비아의 밀림이었다. 11개월 뒤 볼리비아는 체 게바라의 심장에 총알을 박는 것으로 화답했다. 체 게바라의 죽음 이후에도 쿠바는 혁명의 수출을 공공연하게 주장했고 1976년부터 1988년까지의 앙골라 내전에의 참전은 앙골라 사회주의 혁명의 수호가 그 명분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0년 동구권과 소련이 연이어 침몰한 후 곧장 붕괴위기로 내몰린 쿠바에게 라틴아메리카이건 세계이건 혁명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쿠바혁명조차 위기에 내몰렸던 것이다. 2005년 앙골라 참전 30주년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극적인 반전을 상징하고 있다. 1990년대 쿠바가 직면한 위기는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는 고립무원의 위기였다. 혁명의 수출은 커녕 혁명의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쿠바에게 1999년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선거에서 우고 차베스가 당선된 것은 극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2000년대 쿠바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베네수엘라와의 무역협정으로 가능해진 원유의 공급에 힘입은 바가 크다. 94년 일일 2만배럴의 생산량을 2004년 7만5천배럴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필요량의 50퍼센트를 수입에 의존해야하는 쿠바에게 베네수엘라의 원유공급은 가뭄의 단비를 넘어선 것이었다. 쿠바 의사 2만명 베네수엘라로 군부의 쿠데타와 신임투표의 파고를 헤쳐 나가야 했던 차베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베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그가 공언했던 사회주의적 개혁이 부딪혀야 했던 난공불락의 벽이었다. 빈민을 정치적 기반으로 했던 그가 약속했던 의료와 교육의 개혁은 지배계층의 편에 서 있던 의사와 선생들의 저항으로 무산의 지경에 이르러야 했다. 2000년 쿠바와의 자유무역협정은 극적인 활로를 열었다. 쿠바에 원유를 공급한 대금의 일부로 베네수엘라에 쏟아져 들어온 2만여명의 쿠바 의사들은 베네수엘라의 의사들이 가기를 거부했던 빈민들의 산동네를 점령했다. 10만명의 교사 자원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 쿠바의 교사들이 투입되었고 교육받은 자원자들은 빈민과 농민의 주거지역에서 성인문맹퇴치에 나서고 있다. 쿠바의 교육프로그램인 ‘나는 할 수 있다(Si se puede)' 또한 베네수엘라에서 제 몫을 해내고 있다. 오가노포니코와 같은 농업개혁 또한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이미 응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양국 간의 관계가 우호적인 국가 간 협력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아바나대학에서 만난 한 철학·사회과학과 교수는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관계를 ‘사회주의와 국제주의에 기초한 관계’로 표현했다. 양국 간의 관계를 국가 간 협력을 넘어 이념적 연대에 기초한 것으로 보는 이런 관점은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이 베네수엘라가 아닌 라틴아메리카 전체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아옌데가 못한 것을 해내다 원유를 가진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의료부문과 교육부문의 자원을 가진 쿠바의 국가간 협력모델은 천연가스를 가진 볼리비아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재현될 것이고 농축산의 칠레, 광물의 페루 등의 나라들에 좌파정권이 들어서고 유지되는 데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국이 우려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협력관계는 우후죽순으로 번지는 라틴아메리카의 좌경화에 탄력을 불어넣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미국의 앞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반의 바람이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사회주의정권이 넘지 못했던 벽을 넘어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불고 있다는 것이다. 알카(ALCA, FTAA, 미주자유무역지대)와 알바(ALBA, 미주대륙을 위한 볼리바르 대안)는 그 대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뒤이어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알카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저조한 참여로 성사가 불투명한 상태로 답보를 거듭하고 있다. 반면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앞장서 목청을 돋우는 알바는 점차 역내 국가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얻어가고 있다.
유재현/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