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소심한 영웅, 북한산을 정복하다

등록 2009-02-20 20:16

〈백수산행기〉
〈백수산행기〉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

〈백수산행기〉
김서정 지음/부키·1만1000원

주변에 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 산행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있다. 가끔 산 타는 것이 무슨 영웅담인 양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다. 정말이지 얼마나 높은 데를 올랐고, 얼마 만에 주파했는지만을 중시한다면 굳이 왜 산에 오를까 싶다. 어쩌다 산에 관한 책 이야기도 들었다. 1980~90년대 산 책을 펴낸 출판사가 있었는데, 이즈음 활동이 적다고 안타까워했다. 나도 산을 좋아하기는 하나 정기적으로 오르지는 않는지라 심드렁하게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산행기를 읽고 말았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백수 산행기>. 알 만하지 않은가. 직장에서는 쫓겨나고 할 일 없어 빈둥거리다 마누라 눈치 보기도 지겨워 짐 싸서 산에 올랐을 터이고, 거기서 방전된 삶이 충전되는 경험을 했노라 말할 것이다. 내가 무슨 천리안이 있어 제목만 보고 내용을 금세 파악한 것은 아니다. 나도 한 시절을 그리 보낸 적이 있었기에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주로 탔던 산은 관악산이었다. 연주암까지 올라 천원 내고 먹은 비빔밥의 맛이란! 삶에서 좌절을 겪어본 사람만이 알 맛이다.

총각 때보다 30킬로그램 가까이 몸이 불어 산에 오르기가 겁났던 지은이가 북한산에 오르게 된 것도 실직 탓이었다. 흔히 등산 가자면, 올라야 맛이냐 밑에서 막걸리 마시고 있을 터니 얼른 내려오라고 하는 족속이 있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단다. 그런데 “운명처럼, 도둑처럼, 연인처럼, 분신처럼” 북한산이 눈에 들어왔고, 싸구려 등산장비를 사서 오르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 보면 안쓰럽다. 나처럼 소문난 게으름뱅이도 그냥 오르면 되던데, 이 양반 너무 소심하고 겁 많고 주저한다. 그래도 놀랍다. 결국에는 북한산에 대해 그 누구보다 두루 잘 알고 꿰뚫은 사람이 되었으니.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젊은 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고초를 겪었고 문학에 대한 열병에 걸려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지은이에게 동지의식을 느꼈다.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불혹에 직장을 잃는 불운 속에서 산행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은 자못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이 책을 읽고 당장 산에 올라 무언가를 깨달으라고 다그치는 것은 아니다. 지은이 자신이 북한산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딘데다, 주로 산행에 얽힌 이야기라 무언가를 강요하고 있지도 않다.

뱁새가 황새 걸음을 흉내낼 수는 없는 법이다. 가랑이 찢어질 것이 뻔하니까. 그러니, 이 책은 비로소 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나, 좌절이나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읽어보기 맞춤하다. 그렇다고 이 책의 가치를 깎아내리지는 말 것. 황새도 뱁새의 걸음을 흉내낼 수는 없는 법이다. 넘어질 것이 뻔하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며 새로운 희망을 준다면 붙잡아 볼 만하다.

나도 다시 산에 오르려 한다. 뒤져 보니, 장비는 최고급이다. 젊은 날에는 좌절감의 산행이었지만, 이제는 아픈 사연 있는 사람을 안아주는, 그 넓은 품을 닮고 싶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