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내마음속 도서관
랩걸
호프 자런 지음, 김희정 옮김/알마(2017)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연구소에서 방출당한 일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남녀차별을 겪은 한 여성 과학자의 생존과 성공을 향한 분투기 <랩걸>.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 못지않게 그의 평생 동료이자 친구인 빌과의 미묘한 관계가 흥미로웠다. 어떻게 이런 관계가 가능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분명한 거리감이 느껴지고, 우정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가깝다. 연인도 친구도 동료도, 세상 그 어떤 관계를 나타내는 명사도 이들의 독특한 관계를 설명할 수가 없다. 미친 듯이 부러웠다. 여자와 남자 사이에 이런 기적 같은 연대감이 싹틀 수 있다는 것, 서로의 결점을 완벽히 커버할 수 있는 파트너십이 가능하다니. 서로가 모든 어려움을 다 이야기할 수 있고, 어떤 어려움도 함께 이겨나가지만, 어떤 성적 긴장감도 부담감도 느껴지지 않는 해맑고 투명한 관계가 가능할 수 있다니. 가족도 동료도 연인도 아닌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관계를 평생 지속해온 이 두 사람은 교수와 조수라는 고용관계를 뛰어넘어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관계'가 실제로 이 현실 세계에서도 가능함을 눈부시게 증언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서로의 삶에 대한 깊은 경의와 존중 때문이다. 매일 얼굴을 마주 보며 서로의 모든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는 물론 온갖 부끄러운 모습까지 속속들이 알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최고의 파트너로서, 소중한 친구로서, 뛰어난 과학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훌륭한 인간으로서 인정해준다. 둘은 사회적 시선으로 본다면 도대체 가족인지 동료인지 무엇인지 판가름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관계로 보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애정생활에 관여하지 않고 각자가 느끼는 행복과 불행의 영역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준다. 빌은 자신의 남성성을 어필하거나 마초적 본성을 드러내지 않고, 호프는 여자이기 때문에 더 보호받거나 배려받고자 하는 제스처를 전혀 취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전형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을 벗어나 있다는 것, 그것이 이들의 오랜 인연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호프가 26살에 교수가 되어 온갖 성차별의 편견을 뛰어넘어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다는 사실도 물론 감동적이지만, 나는 과학자가 이토록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것과 그녀가 이룬 업적만큼이나 아름다운 빌과의 우정이 더욱 감동적이었다. 함께 하는 20년의 시간동안 그들은 학위를 세 개나 따고, 직장을 여섯 번 옮기고, 16개국을 여행하고, 중고차를 8번이나 바꾸고, 약 6만5000개에 달하는 탄소 안정적 동위원소를 측정해냈다. 그녀의 남편조차도 그녀와 빌의 관계에 대해 전혀 의심하거나 제동을 걸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서로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거리감’을 존중해주는 태도야말로 상대를 구속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이 서로의 인생에 참여하는 길이 아닐까. 남녀 사이의 진정한 우정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 남녀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성적 긴장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믿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 때로는 사랑보다 깊은 우정도 가능하다. 누군가는 사랑과 우정은 물론 그 모든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서로를 완전히 존중하고 이해하며 배려하는 그런 꿈같은 인간관계를 바로 이 세상에서 실현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호프 자런 지음, 김희정 옮김/알마(2017)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연구소에서 방출당한 일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남녀차별을 겪은 한 여성 과학자의 생존과 성공을 향한 분투기 <랩걸>.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 못지않게 그의 평생 동료이자 친구인 빌과의 미묘한 관계가 흥미로웠다. 어떻게 이런 관계가 가능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분명한 거리감이 느껴지고, 우정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가깝다. 연인도 친구도 동료도, 세상 그 어떤 관계를 나타내는 명사도 이들의 독특한 관계를 설명할 수가 없다. 미친 듯이 부러웠다. 여자와 남자 사이에 이런 기적 같은 연대감이 싹틀 수 있다는 것, 서로의 결점을 완벽히 커버할 수 있는 파트너십이 가능하다니. 서로가 모든 어려움을 다 이야기할 수 있고, 어떤 어려움도 함께 이겨나가지만, 어떤 성적 긴장감도 부담감도 느껴지지 않는 해맑고 투명한 관계가 가능할 수 있다니. 가족도 동료도 연인도 아닌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관계를 평생 지속해온 이 두 사람은 교수와 조수라는 고용관계를 뛰어넘어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관계'가 실제로 이 현실 세계에서도 가능함을 눈부시게 증언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서로의 삶에 대한 깊은 경의와 존중 때문이다. 매일 얼굴을 마주 보며 서로의 모든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는 물론 온갖 부끄러운 모습까지 속속들이 알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최고의 파트너로서, 소중한 친구로서, 뛰어난 과학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훌륭한 인간으로서 인정해준다. 둘은 사회적 시선으로 본다면 도대체 가족인지 동료인지 무엇인지 판가름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관계로 보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애정생활에 관여하지 않고 각자가 느끼는 행복과 불행의 영역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준다. 빌은 자신의 남성성을 어필하거나 마초적 본성을 드러내지 않고, 호프는 여자이기 때문에 더 보호받거나 배려받고자 하는 제스처를 전혀 취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전형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을 벗어나 있다는 것, 그것이 이들의 오랜 인연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호프가 26살에 교수가 되어 온갖 성차별의 편견을 뛰어넘어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다는 사실도 물론 감동적이지만, 나는 과학자가 이토록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것과 그녀가 이룬 업적만큼이나 아름다운 빌과의 우정이 더욱 감동적이었다. 함께 하는 20년의 시간동안 그들은 학위를 세 개나 따고, 직장을 여섯 번 옮기고, 16개국을 여행하고, 중고차를 8번이나 바꾸고, 약 6만5000개에 달하는 탄소 안정적 동위원소를 측정해냈다. 그녀의 남편조차도 그녀와 빌의 관계에 대해 전혀 의심하거나 제동을 걸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서로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거리감’을 존중해주는 태도야말로 상대를 구속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이 서로의 인생에 참여하는 길이 아닐까. 남녀 사이의 진정한 우정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 남녀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성적 긴장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믿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 때로는 사랑보다 깊은 우정도 가능하다. 누군가는 사랑과 우정은 물론 그 모든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서로를 완전히 존중하고 이해하며 배려하는 그런 꿈같은 인간관계를 바로 이 세상에서 실현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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