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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분열된 여성의 정체성, 새로운 삶을 꿈꾸다

등록 2019-03-15 06:00수정 2019-03-15 20:09

[책과 생각] 정여울의 내마음속 도서관

나목
박완서 지음/세계사(2012)

여주인공의 내면을 생기 넘치게 그려낸 소설들을 보면 ‘그때는 없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눈부신 것인지를 새삼 뭉클한 마음으로 되새기게 된다. <오만과 편견>을 읽으면 여성에게는 상속권 자체가 없었던 시대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 저항했던 제인 오스틴의 주인공들이 가슴을 저리게 하고, <제인 에어>나 <폭풍의 언덕>을 읽으면 여성의 직업선택권이 거의 없었던 시대의 여성들이 ‘누구의 딸이나 아내’가 아닌 또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해 분투했던 시절의 고통이 마음속에 아픈 그림자를 드리운다. 박완서의 <나목>을 읽으면 한국전쟁 당시 여성들이 ‘직업의 선택’은커녕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존조차 누리지 못했던 시절의 아픔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나목>의 경아는 끊임없이 현실로부터 도망친다. 두 아들을 모두 전쟁의 포격으로 잃고 아무런 생의 의지 없이 유령처럼 살아가는 어머니로부터. 경아는 분투한다. 어머니처럼 미치지 않기 위해, 자신을 ‘관리대상’으로 생각하는 큰아버지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차피 미군 피엑스(PX)에서 일하는 여성은 타락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목>의 남성들은 경아를 성적인 유혹의 대상, 결혼의 대상,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누구도 그녀를 진정한 주체로 봐주지 않는데, 가난한 화가 옥희도만이 그녀를 참된 인격적 대상으로 대해준다. 이 소설에는 유난히 ‘놓여나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경아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느라 바쁘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넋두리로부터 놓여나고 싶고, 빈곤과 타락과 히스테리가 한데 뭉친 사람들의 신경질적인 대화로부터 놓여나고 싶다.

친오빠 두 명이 모두 포탄에 맞아 처참하게 살해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경아의 탈주는 ‘누구도 침해하지 못하는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옥희도는 경아의 소외감과 숨은 재능을 유일하게 인정하고 보듬어주는 사람이기에, 그가 유부남임을 알면서도 경아는 그에게 끌린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옥희도와 경아가 장난감 가게에서 침팬지인형을 바라보며 우리에게는 반드시 각자가 짊어져야만 하는 고독이 있음을 깨닫는 장면이다.

경아가 옥희도의 마지막 조언처럼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출발을 꿈꾸었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헨리크 입센의 노라보다도,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보다도,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에 나오는 잔보다도 훨씬 나은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학식과 재능이 있고, 세상을 헤쳐나갈 뚝심도 있다. 그녀가 가부장적 권력을 그토록 혐오했음에도 결과적으로 또 하나의 안락하고 상식적인 스위트룸의 세계로 안착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상실의 고통 속에서 남들처럼 증오와 분노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분히 상처의 풍경을 돌아보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는 길이 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녀는 옥희도가 그린 나무 그림을 통해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눈부신 봄의 희망을 묵묵히 피워 올리는 겨울나무의 영혼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그녀가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했다면, 트라우마의 폐허 위에서 더 나은 삶을 꿈꿀 자유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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