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정여울의 내마음속 도서관
켄지 요시노 지음, 김현경·한빛나 옮김/민음사(2018) 처음으로 외국여행을 떠났을 때, 나는 ‘너무도 한국적인 내 이름’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내 여권 커버를 벗기며 영문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던 외국인들은 내 이름을 결코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한국 이름들 중에서도 유난히 외국인이 읽기 힘든 내 이름, ‘정여울’을 서툴게 발음하며 은근히 인종차별적인 뉘앙스가 다분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외국인들.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내 이름에 찍힌 어떤 비밀스러운 낙인을 느꼈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사랑받던 그 이름이 외국에 가면 낯설고 기이한 무언가로 바뀌어버렸다. ‘이안’이나 ‘제인’ 같은 영어 표기가 쉬운 이름으로 바꾸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이렇듯 ‘주류’에 속하고 싶어 나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고 싶은 충동이 바로 ‘커버링’이다. 나는 켄지 요시노가 쓴 <커버링>의 첫 문장에서 명쾌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누구나 커버링을 한다. 커버링이란 주류에 부합하도록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의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류에 속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유행하는 스타일로 옷을 챙겨 입고, ‘요즘 대세’로 불리는 라이프스타일로 삶의 습관을 바꾸는 수고를 마다지 않는다. 심지어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 주류에 편승하기 위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무고한 사람을 왕따로 만든다. 동성애자임을 숨기기 위해 오랫동안 이성애자의 커버링을 계속해왔던 저자는 바로 그 주류에 편입되기 위한 커버링이야말로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임을 깨닫는다. 그는 더 이상 ‘이성애자인 척하는 동성애자’로 살아갈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유능하면서도 게이임은 굳이 드러내지 않는 법관’이 아니라 ‘게이임을 어디서든 숨기지 않고 동성애자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법관’이 되기로 결심한다. 커버링은 도처에 만연해 있다. 국적을 커버링하기 위해 미국식 이름으로 개명한 유명인들은 수도 없이 많고, 루스벨트 대통령조차 휠체어를 탄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휠체어를 책상 뒤에 숨겨놓았다. 자신의 동성 연인을 공식석상에서 보여주지 않는 사람들도 많고, 마거릿 대처 수상은 발성 코치에게 음색을 남성처럼 낮추는 훈련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여성성을 커버링했다. 내게도 커버링이 있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여성이라는 것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 글쓰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여성인 것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건조하고 딱딱한 문체로 글을 써보기도 하고, 레이스나 리본이 달린 옷을 피하고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옷을 입어보기도 했지만, 그 어떤 커버링으로도 내면의 여성성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제 나는 외국인들이 발음하기에 쉽고, 굳이 한국인스러움을 드러내지 않는, 보다 보편적인 알파벳 이름을 꿈꾸지 않는다. 내 이름이 필명인지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는데, 내 이름은 항상 본명이었다. 한글 이름이며, 한자 이름조차 없는, 내 아버지가 지어주신 단 하나의 이름을 되뇌며, 이제 살아 있는 동안 점점 더 이미 나에게 덧씌워진 수많은 커버링들을 하나씩 지워가기로 한다. 그리하여 내가 점점 더 나다워지기를, 내가 다만 꾸밈없는 나임으로써 최고의 자유를 얻기를 꿈꾼다. 나는 나인 채로, 당신은 당신인 채로, 아무 것도 바꾸거나 덧칠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존재 그 자체로 반짝반짝 빛날 수 있기를.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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