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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날씨 속에 담은 인류의 기억을 탐사하다

등록 2019-01-04 06:00수정 2019-01-04 19:57

[책과 생각] 정여울의 내마음속 도서관

예술가들이 사랑한 날씨
알렉산드라 해리스 지음, 강도은 옮김/펄북스(2018)

처음 파리에 갔을 때 가장 놀라웠던 거리 풍경은 사람들의 옷차림이었다. 분명 겨울 날씨인데 사람들의 옷차림은 그야말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한데 공존하고 있었다. 그 추운 날씨에 민소매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활보하는 청년이 있는가 하면, 하늘거리는 프릴 원피스 하나만 입고 사뿐사뿐 봄소풍을 가는 듯한 아가씨도 있었고, 마치 시베리아에 유배라도 온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털코트에 털모자로 온몸을 중무장한 사람도 있었다. 계절은 겨울이지만 워낙 전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들다 보니 저마다 느끼는 ‘상대적인 날씨’가 다르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때부터 계절과 날씨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봄여름가을겨울을 모두 골고루 경험할 수 있기에 축복받은 나라처럼 느껴졌고, 365일 온난한 기후를 자랑하는 하와이 같은 곳은 매우 살기 좋긴 하지만 단조로워 보이기도 했다.

이 책은 변화무쌍한 날씨의 변덕 속에서 인류가 어떻게 다양하게 대처해왔는지를 수많은 문학과 예술작품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타난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맥베스 부부의 질풍노도 같은 감정변화, 날씨와 풍경이라는 주제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화가 윌리엄 터너, 존 컨스터블의 아름다운 풍경화에 나타난 천변만화한 날씨들,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의 작품에 나타난 날씨에 대한 온갖 풍요로운 묘사와 인간의 미묘한 심리변화, 버지니아 울프와 이언 매큐언, 줄리언 반스 같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 속에 나타난 온갖 날씨에 관련된 에피소드와 인간심리의 복잡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이 섬세하고 예민하게 기록하고 묘사한 날씨 속에 담긴 인류의 기억들은 단지 ‘사전적 의미의 날씨’가 아닌 ‘인간의 상상 속에 매일매일 창조되는 날씨 이야기’로 눈부시게 확장된다.

햇살, 비, 바람, 구름, 안개, 서리, 눈보라, 폭풍우, 천둥, 번개, 홍수, 가뭄. 이 모든 날씨의 흔적들 속에 우리의 가슴 아픈 사연과 끊을 수 없는 인연들, 잊을 수 없는 달콤한 추억과 뼈아픈 기억들이 얽혀 있을 것이다. 눈부신 햇살이 가득한 화창한 날씨도 좋지만, 때로는 흐릿한 구름이 잔뜩 낀 우중충한 날씨가 격정과 슬픔을 강화하기도 한다. 오색찬란한 모네의 수련이 빛나는 대낮도 아름답지만,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처럼 오직 밤에만 볼 수 있는 자연의 절경도 있다. 저자는 숭고함에 가장 가까운 날씨는 놀랍게도 가장 최악의 날씨라고 한다. “우리 안의 장엄한 열정을 형성하는 데 자연이 가진 어둡고 혼란스럽고 모호한 이미지들이 깨끗하고 분명한 이미지보다 훨씬 큰 힘을 갖고 있다.” 그러고 보니 <폭풍의 언덕>의 그 열정적인 러브신은 눈보라나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는 요크셔 지방의 날씨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 같다.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국왕을 암살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맥베스 부부의 그 무시무시한 ‘죄책감의 밤’ 또한 스코틀랜드의 그 음산한 날씨와 어우러져 더욱 긴장감 넘치는 하모니를 연출한다.

오늘 ‘내 인생의 날씨’는 어떤지, 내 삶의 가장 특별한 추억들과 어울리는 날씨의 역사는 어떤 것들이었는지 기억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날씨는 어쩌면 인류의 수많은 기억들을 저장해놓는 인류 공통의 언어이자 저마다의 소중한 타임캡슐이 아닐까.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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