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소설가
저공비행
‘늙음’은 어떤 걸까. 아직 늙지 않은 나는 스스로의 몸이 늙어가는 느낌에 대해 또렷하게 알지 못한다. 한살 더 먹고 보니 숙취가 심해졌다는 둥, 나날이 늘어가는 목주름 때문에 골치라는 둥, 더 늦기 전에 주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기 시작해야 한다는 둥. 이렇게 엄살을 있는 대로 늘어놓지만 사회적으로 두루 통용되는 ‘늙은 나이’와는 아직 거리가 먼 연령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에게 이런 식의 ‘늙음’ 타령이란 일종의 커다란 과장일 뿐이다.
지난해 말, <씨네21>에서 2005년 영화계를 결산하며 한 해의 주요경향 중 하나로 꼽은 것이 ‘노인코미디’였음을 기억한다. 그 사실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언제부터인가 연세 지긋한 원로(?)배우들께서 각종 코미디영화의 주인공, 혹은 감칠맛 나는 조연으로 등장하여 맹활약을 펼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건강한 생의 욕망으로 충만한 <마파도> 할머니들 덕분에 신나게 웃었고, 갖은 우아와 고상을 떨다가도 결정적 순간에 ‘옘병-’을 외쳐대는 시트콤 속 김수미 사모님 덕분에 스트레스를 털어 보냈다. 중년의 나이를 넘겼다고 해서 반드시 뻣뻣하고 권위적인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분들은 몸소 일러주었다.
원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견배우들 역시, 한때의 매력남 아이콘 박영규(진짜다. 이분이 김희애 상대역으로 나와 임채무와 삼각관계를 이뤘던 <내일 잊으리>란 드라마가 아직도 생생하다)가 ‘미달이 아빠’로 변한 것을 신호탄 삼아, 코믹한 이미지로의 변화들을 시도하는 듯 보인다. 이른바 전성기 시절의 이미지를 버리고 ‘망가지는’ 코미디 연기에 도전하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무릇 ‘예술’을 업으로 삼았다면, 늘 똑같은 틀 안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의 몸을 갱신하여 역사를 새로 써 나가는 쪽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것은 불문가지일 터. 한 때 날리던 멜로배우였다고 해서 평생 그 이미지에 얽매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고개를 쳐드는 이유는 가끔씩 겸연쩍기 때문이다. 이 겸연쩍음은, 그분들이 몸으로 체화시켜내는 연기의 내용에서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맡아 하는 ‘희화화된 노인 캐릭터’에서 비롯된다. ‘일용엄니’를 끝내자마자 영화와 시트콤, 광고 등의 각종영역에서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카리스마로 코미디 재능을 맘껏 드러내고 계신 김수미 선생님. 그분을 좋아하지만, 그래서 감히 언급하기 죄송하지만,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3>의 이사벨 같은 캐릭터로 소비되고 말기에는 그분이 가진 잠재력이 너무 아깝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스물 네 살의 처녀에서 어느 날 갑자기 오십대로 변한 여자 뱀파이어라는 설정은 매력적이었지만, 이사벨은 극 내내 과장되고 희화화된 모습으로 비춰지기만 했다. 그 연기자의 코미디 능력만을 쓱 뽑아다 쓸 요량만이 아니라, 그분이 쌓아온 인생의 연륜과 깊이를 캐릭터 속에 조금 더 능동적으로 반영했다면 어땠을까. 여성에게 생물학적 젊음과 늙음이 주는 씁쓸한 의미에 대해 보다 날카롭게 성찰하고 나아가 해방적 느낌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이는 것이다.
이젠 부디 마냥 웃기는 주책바가지 노인네거나 주인공남녀의 중심서사에 양념을 치는 조부모가 아니라 좀 신선한 역할로 정겨운 노배우들과 조우하고 싶다. (열렬한 멜로여도 좋고!) 그 나이에 닿아본 자만이 표현할 수 있는 황혼의 고뇌에 대해, 아름다움과 회환과 기쁨에 대해 정직하게 응시하는 속 깊은 시선. 그것이 닮고 싶은 ‘늙은’ 예술가의 초상이다.
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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