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영 영화평론가
저공비행
<왕의 남자>의 흥행 폭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특급 스타가 나오지 않는 사극이 이런 신드롬을 일으킬지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같은 날 개봉한 <청연>의 흥행 참패도 이례적이다. 배우 유명세나 만듦새가 뒤지지 않는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영화 흥행의 궁극적 요인은 아무도 모른다. 직업이 그렇다보니 누군가 물어오면 이것저것 주워섬기지만, 사전에 예측하지 못했고(그걸 잘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인과론이 다른 영화들에도 적용되지 않는 한, 흥행에 관한 사후 분석은 기껏해야 불확실한 짐작일 뿐이다. 다만 두 영화는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준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연인의 상실로 고통 받다가 죽음을 택하는데, 그 죽음의 방식이 자신의 직업 세계 안으로의 소멸이라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청연>의 비행사 박경원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왕의 남자>의 두 줄광대는 외줄 위의 허공에 못박힌다.
두 영화는 모두 주인공들의 자살에 숭고한 승천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박경원은 지상보다 창공에 머물기를 더 원했으며 장생과 공길은 외줄 위의 허공에서 지상의 율법을 희롱하며 살았으므로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운명적 비애의 기운이 스며있다. 그것은 아름답고 비감하다.
비상을 꿈꾸는 직업과 그 비상의 이미지가 죽음과 만나는 결말이라는 이 흥미로운 공통점은 또한 두 영화가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청연>은 한국영화로선 유례없이 직업세계에 대한 묘사가 충실하다. 그녀는 창공에 매혹됐고 비행의 욕망을 위해 오랜 수모와 시련을 수긍한다. <청연>은 장인 ‘되기’의 고난과 장인성의 매혹을 충실히 묘사한다. 한국영화가 대개 직업 세계에 무심한 반면 시련과 고난을 과잉 설정함으로써 종종 수난의 추상화가 되는 경향을 감안한다면 이건 이 영화의 좋은 점이다. <청연>은 구체적 개인 혹은 욕망에서 출발한다.
<왕의 남자>의 장생과 공길은 태생이 천민이며 처음부터 광대가 ‘되어있는’ 인물이다. 그는 너무 뛰어난 광대여서 줄타기, 가면극, 재주넘기에 두루 능할 뿐 아니라 처음 시도하는 경극 공연도 순식간에 해치운다. 계급과 마찬가지로 장인성은 그에게 서사 이전에 고정불변의 완전한 것으로 주어져있으며, 그가 펼치는 갖가지 공연들은 주로 그 자체의 매혹 대신 공연 이후의 사건 유발을 위해 기능한다. <왕의 남자>는 처음부터 추상적 질서가 앞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결말에 가까이 가면서 두 영화의 양상이 역전된다. <청연>에서 박경원의 연인은 일본 경찰에 의해 고문당한 뒤 죽는다. 나는 이 허구가 박경원의 친일행적을 미화했다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이 설정은 너무 편의적이다. 이 허구는 그녀의 자살을 결국 사악한 일제 탓으로 돌린다. 박경원은 비행이라는 내면의 욕망을 위해 부당한 질서를 끌어안고 살아가던 흥미로운 인물이다. 공인된 악을 동원해 그를 순결한 희생자로 만드는 순간 민족주의적 강박증에 사로잡히면서 이야기는 매력을 잃는다.
<왕의 남자>의 장생은 반대다. 그는 천민계급이며 지배계급을 조롱하는 광대다. 그것은 처음부터 기성 질서의 피해자이자 대결자의 자리다. 그러나 자신의 최후를 택할 때, 그를 움직이는 건 연인 공길을 향한 내면의 욕망이다. 공길은 왕의 곁에 머물기를 택한다. 장생은 궁에 머물 수도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생은 공길을 놓을 수 없었고 그가 곁에 있어도 품을 수 없었다. 자기 속의 욕망과 금기가 그를 눈멀게 하고 죽음을 택하게 한 것이다.
<청연>에 가해진 친일 미화 혐의는 전적으로 부당하지만, 역사 속 인물을 그리는 방식에서 <왕의 남자>가 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그 편이 더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허문영/영화평론가
<청연>에 가해진 친일 미화 혐의는 전적으로 부당하지만, 역사 속 인물을 그리는 방식에서 <왕의 남자>가 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그 편이 더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허문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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