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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영화는 극장 어두운 곳에서 비로소 말문을 연다

등록 2006-02-08 18:17수정 2006-02-09 17:42

허문영 영화평론가
허문영 영화평론가
저공비행
영화감독이자 비평가인 프랑수아 트뤼포가 쓴 <히치콕과의 대화>는 트뤼포의 모든 영화들만큼 중요한 업적으로 칭송된다. 이 책의 놀라운 점 가운데 하나는 트뤼포의 관찰력이다. 그는 1천개가 넘는 질문에서 54편에 이르는 히치콕 영화의 세부들, 예컨대 카메라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상기시킨다. 예를 들면 트뤼포는 “(<오명>에서) 카메라가 샹들리에 위에서 홀 전체를 찍은 뒤 서서히 내려와서 잉글리드 버그만의 손에 쥐어진 열쇠를 잡는데…”라고 묻는다. 두 사람의 인터뷰는 1962년에 이루어졌다. 홈비디오가 일반화되기 20년 전이며, 극장의 어둠 속 말고는 영화를 마주할 곳이 없었던 시대다. 꼼꼼한 메모 습관이 있다 해도 고도의 집중력과 관찰력이 없다면 이 인터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벤야민은 “영화 관객은 정신이 산만한 시험관”이라고 말했는데, 1940년에 자살한 그가 살아서 이 책을 봤다면 그 표현을 수정했을지도 모르겠다.

벤야민이 “영화 관객의 비평적 태도가 주의력을 포함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종교의식적 가치를 뒷면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오락영화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다른 종류의 영화 뿐 아니라 극장이라는 공간이 지닌 어둠과 크기를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것 같다. 난반사하는 빛의 입자들이 어둠을 경유해 대형 스크린에 투사되는 순간, 영화는 지상의 유일하며 거대한 존재가 된다. 이 과정은 종교 의식과 비슷한 점이 있다. 장 르느와르는 찰리 채플린을 만나러 갈 때 “신을 알현하는 신도의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트뤼포의 뛰어난 집중력과 관찰력은 이 어둠과 크기의 효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전후해 뜻있는 감독과 평자들은 시네마테크 관객 감소에 대한 우려를 다양한 방식으로 말했다. 흥미로운 건 그들이 시네마테크를 옹호하기 위해 쓴 표현이 70년 전 벤야민이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의 부정적인 면을 말하기 위해 쓴 표현과 같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예술작품 혹은 사물과 자연의 독특한 존재감을 뜻하는 ‘아우라’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거리가 기계복제시대에 이르러 모든 것들을 서로 이어붙인 영화에 의해 실종된다고 말했다. 2000년대의 평자들은 극장 체험을 통하지 않고는 영화의 ‘아우라’를 진정으로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은 영화의 이미지가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변하고 있는 곳이다. 본격적인 유비쿼터스 시대가 오기 전인데도 영화는 이미 도처에 있다. 텔레비전에 컴퓨터 모니터에 심지어 휴대전화기에 영화가 있다. 20년 전이라면 절대 볼 수 없었던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은 온라인가게에서 3900원에 주문할 수도 있고, 모 사이트에서 다운로드받아서 볼 수도 된다. ‘산만한 관객’은 이런 체험에 보다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1980년대까지 한국은 좋은 영화를 보기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나라 중의 하나였다. 지금은 세상에서 영화를 가장 손쉽게 볼 수 있는 나라 중의 하나가 됐다. 해적판 디브이디와 불법 파일공유라는 비정상적 방식에 힘입은 이 급속한 이행에는 문화적 저개발로부터의 탈출 욕구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 탈출을 정부와 제도가 하지 못했으므로 개인들이 비합법적으로 수행하려 한 것이다. 그러면서 가장 귀했던 것이 가장 흔한 것이 돼버렸다.

어둠 속에서 방해받지 않은 채 유일한 것으로 보여질 때 비로소 말을 거는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들일수록 시장은 외면하고 그럴수록 더욱 헐값에 유통되며 어둠과 크기의 기회를 잃는다. 드레이어의 <분노의 날>과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이 ‘3장에 1만원’이라고 씌어있는 노천 디브이디 좌판에 놓여있는 모습을 보는 일은 그래서 착잡하다.

허문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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