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소설가
저공비행
공주병은 가라. 바야흐로 전 국민 동안병(童顔病)의 시대가 도래했나니. 동안. 말 그대로 ‘나이 든 사람의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일컫는다. 이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라는 의미로 살짝 변형되어 쓰이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에게 잘 보이고 싶거든 예뻐졌다, 멋있어 졌다는 간지러운 말보다 “어떻게 나이를 거꾸로 드세요?” 라고 가볍게 놀라는 척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건 이젠 삼척동자도 다 아는 비밀이다.
뭐 지금 남의 얘기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연갈색 머리칼을 새까맣게 염색하면 훨씬 어려보일 거라는 미용사의 조언에 홀딱 넘어가 거금을 투자하여 흑발로 변신한 인간이 바로 여기 거울 속에도 하나 있으니 말이다. 한살이라도 어려 보일까 싶어 앞머리를 뱅 스타일로 잘라 이마를 덮는 것은 ‘어려 보이기’의 기본 중에 기본. 화장할 때 촉촉한 느낌으로 피부표현을 해주면 어려 보인다는 말을 주워들은 뒤부터는 촉촉이 지나쳐 축축, 아니 아예 구두약을 문댄 듯 번들거리는 얼굴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피부노화에 치명적이라는 자외선을 막기 위해 자외선차단지수가 높디높은 U.V크림으로 처덕처덕 기초공사를 했음은 물론이다. “우와~ 그 나이로 안 보이세요”라는 옷가게 판매원의 감탄사가 농후한 장삿속에서 비롯된 것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입이 귀에 걸려서는 안 어울리는 옷을 잔뜩 사버린 일도 없지 않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이렇듯 주절주절 고백하고 있는 것은, 확신컨대 이것이 나 혼자만의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우연히 대화를 나누다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스스로를 나이보다 몇 살 어려보인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것을 알고는 흠칫 놀란 적이 많다. 입으로야 “그래. 누가 널 30대 중반으로 보겠니?” 라고 맞장구쳐주지만, 저 모습이 내 모습이겠거니 싶어 우울해진다. 모 방송사에서 실시한 ‘동안선발대회’라는 요상한 이름의 대회가 설날 연휴 동안의 오락프로그램 중에서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어려보이는 인상의 소유자’들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이는 마흔 여섯 살의 주부다. 스무 살짜리 친아들과 나란히 선 그 모습은 과연 어머니가 아니라 여자친구라 해도 믿을 만큼 ‘어려’ 보였다. 그 외에도 현란한 다리 찢기와 허리 돌리기 신공을 선보인 64세의 할머니, 수줍은 중학생처럼 보이는 30대 남성은 시청자의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혹시 보톡스를 맞은 걸지도 모른다는 둥, 활짝 웃지 않고 무표정을 고수한 건 눈가 주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라는 둥, 질투 섞인 뒷담화를 꿍얼대어보지만 텔레비전을 끄고 돌아서며 느끼는 감정은 역시 부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슴 한 쪽에 설명하기 어려운 씁쓸한 의문이 묻어나는 것은 왜 일까.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것이 한 개인의 내적자원인지 외적자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살이라도 덜 먹어 보이기 위해 기를 쓰고 용을 쓰는 이 시대의 세태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건지 자못 아리송하다. 서른다섯 살의 한 인간이 (백번 양보하여) 서른 살 즈음으로 보인다고 해서 대체 본인의 정신적 만족 외에 달라질 일이 무어란 말인가.
동안 권하는 사회가 무서운 이유는 ‘어린 것은 아름답고, 늙은 것은 추하다’는 대전제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노소(老少)의 기준점이 오로지 외모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동안 열풍 밑에는 어쩌면 교묘한 자본의 논리가 숨어있다. 젊은이들이 쓰고, 젊어지기 위해 쓴다. 불로주를 팔고 사는 소비메커니즘의 쳇바퀴 속에서 사람들은 영원한 젊음을 간직하기 위해, 혹은 늙음을 끊임없이 유예하기 위해 오늘도 기꺼이 지갑을 연다.
아아, 모두 다 나의 부질없는 변명이다. 이 다크서클만 없애 준다면, 입가의 팔자주름만 완화시켜 준다면 주머닛돈을 털어 당장 달려갈 주제에!
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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