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영 영화평론가
저공비행
한 저예산 영화 촬영 현장에 갔다가 뒷풀이에 끼게 됐다. 개봉을 앞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주연 문소리와 지진희의 ‘야심만만’ 출연이 화제에 올랐다. 평소에 진지한 이미지로 알려진 두 배우가 버라이어티쇼에 나간 게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더 뜻밖에도 두 사람은 재치있는 입담으로 좌중을 즐겁게 했다고 한다. 한 스태프가 말을 꺼냈다. “우리 배우들도 개봉할 때 나가야 되나?” 감독이 웃으며 답했다. “우리는 아예 부르지도 않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아마 그 감독의 말이 맞을 것이다. ‘야심만만’은 개봉을 앞둔 영화의 배우가 출연한다고 해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전혀 나누지 않고, 그날의 주어진 주제에 매진한다. 당연히 영화 자체나 연기력보다 출연자의 말솜씨가 중요하고 또 그의 말에 촉각을 곤두세울 만큼 지명도가 있어야 한다.
물론 ‘야심만만’만 그런 건 아니다. 비슷한 포맷의 프로그램은 각 방송사마다 있다. 충무로에서 영화가 개봉될 무렵에는 이 프로그램들에 주연 배우를 출연시키느냐 마느냐가 해당 영화의 제작사나 홍보사에겐 큰 숙제가 된다. 물론 영화 이미지와 이 프로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혹은 배우가 은둔형일 경우에 방송사의 요청에 응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수들과 음반 제작사들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야심만만’이란 프로 자체에 대해선 불만 없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즐겨보며, 김수로와 이혁재를 비롯한 입담의 대가들이 주는 즐거움은 웬만한 코미디를 능가한다. 그런데 그날 제작진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배우를 배우로 그리고 가수를 가수로 대하는 텔레비전 프로가 점점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재담 프로들뿐만 아니라 연예인 게임쇼나 짝짓기 쇼 출연자들의 본업을 알아맞히는 것은 텔레비전을 꾸준히 보지 않는 사람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며칠 전 연예인이 20명 넘게 출연하는 한 텔레비전 프로에 면식이 있는 어떤 중견배우가 나와 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는 최근 개봉한 영화의 주연을 맡았고, 그 영화의 흥행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출연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텔레비전에서 자신이 출연한 영화에 대해, 혹은 자신의 연기 인생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그러지 못했다.
소재 확장과 형식 다양화라는 좋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방송은 대중문화 종사자들의 장인성 존중이란 면에서는 퇴보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방송은 대중문화의 장인들을 등장시킬 때 장인으로서의 성취에 앞서 재담꾼으로서의 자질에 집중하거나 특정한 캐릭터 이미지의 틀에 맞추는 일에 치우쳐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휴먼스토리의 주인공으로서의 자질을 따진다. 그 자질이 부족하거나 그 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성취에 관계없이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백윤식이 출연한다면 그의 재담 거리가 아니라 그가 자기 분야에서 이룬 성취를 질문해야 한다. 이건 공익 이전에 예의의 문제다. 텔레비전 가요 순위가 불신 받고 연말 가요 프로에 몇몇 가수들이 나오지 않으려는 건 단지 그들의 노래가 방송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허문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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