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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세상 모든 것들의 이름 불러내는 예술

등록 2006-06-18 21:17

저공비행
국내 번역본에는 보이지 않지만, 작년에 나온 폴 오스터의 소설 〈브룩클린 풍자극〉의 원서에는 브룩클린 거리를 찍은 사진이 표지에 실려 있다. 미국판과 유럽판의 표지 사진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스모크’를 떠올리게 하는 그 분위기는 비슷하다. 도시의 어느 모퉁이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후회와 용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폴 오스터의 세계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이미지는 없을 듯하다. 이 이미지가 매력적인 까닭은 그 거리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모두 담아내려는 폴 오스터의 열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왕가위 감독에게 영향을 준 미국의 사진작가 낸 골딘의 작품에서도 이런 특징은 보인다. 폴 오스터의 주인공은 소설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책’을 만드는데, 낸 골딘의 작품을 들여다 보노라면 그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이해할 만하다. 그건 바로 타인의 삶 속으로 깊이 개입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낸 골딘의 카메라는 친구들의 삶과 사랑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거기에는 소위 ‘쿨’한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다들 도시의 이미지는 쿨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술가에게 도시는 너무나 뜨거운 공간이다.

파이돈출판사에서 나온 낸 골딘의 사진집 〈악마의 놀이터〉를 펼치면 첫 페이지에 위츨라브 심보르스카의 시가 나온다. “강 줄기, 숲과 해변과 사막과 빙하의 모양을 빼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변해가지만 그 풍경 속을 떠도는 영혼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은 늘 그대로다. 언제나 다른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여기가 도시라고 하더라도, 지금이 21세기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정신은 결국 다른 인간에게로 연결될 뿐이다. 쿨한 예술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독일의 밤베르크라는 곳에 머물고 있었다. 16세기에 건설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도시였다. 내가 머문 곳은 운하 옆에 있는 콘코르디아 빌라라는 곳이었다. 16세기에 지어진 대저택으로 상당히 너른 정원에는 분수와 조각상까지 있었다. 나는 그 빌라의 3층 방을 사용했는데, 드높은 천장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문득 잠에서 깨면 그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럴 때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방에서 살았을까, 그들은 어떤 사랑을 했으며 죽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 건물 지하의 도서실에서 나는 심보르스카의 다른 시를 읽었다. “내 기억에서 희미해지는, 죽은 자들이여. 이제 모두 잊어주기를”이라고 말하며 심보르스카는 연신 사과한다는 말을 되뇐다. 그 시구는 다시 친구 필리핀의 자살 소식을 들은 날, 낸 골딘이 찍은 황혼 사진을 연상시켰다. 낸 골딘이 찍은 황혼의 빛깔은 핏빛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십대의 친구가 죽던 날, 핏빛으로 황혼을 찍을 만큼 낸 골딘은 예술적으로 용기가 넘쳤다.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사과한다고 말한 심보르스카처럼.

〈브룩클린 풍자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거리를 따라 걸으며 “그때까지 살아왔던 어느 누구 못지않게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세계 무역 센터의 북쪽 타워에 첫 번째 비행기가 충돌하기 딱 46분 전인 2001년 9월 11일 오전 여덟 시의 일이다. 아무리 ‘쿨’한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하얀 구름처럼 쏟아져 내리는, 그 죽음과 재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소설은, 사진은, 시는 세상 모든 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 본질적으로 예술은 그처럼 뜨겁기만 하다.

김연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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