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3학년 때인 1955년 가을, 아픈 몸으로 학교 운동회를 지켜보고 있는 필자(왼쪽).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개헌반대 반전평화 독서회 ‘이시와리’도 갑작스런 발병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1954년 우익의 재군비를 위한 헌법 개정 움직임에 대항한 평화헌법 옹호 단체에 들었다.
학교에도 독서회 ‘이시와리(돌깨기)’를 만들었다. 거기에 재일 조선인 여학생 Y가 가입했다.
학교에도 독서회 ‘이시와리(돌깨기)’를 만들었다. 거기에 재일 조선인 여학생 Y가 가입했다.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⑤ 독서회 ‘이시와리’ 헌법개정, 재군비 움직임이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내가 고교 1학년에 다니던 해 가을인 1953년 11월, (공직)추방에서 해제된 하토야마 이치로가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에 복귀한 때였다. 하토야마가 복귀 조건으로 내건 것이 헌법개정위원회의 설치였다. 하토야마와 마찬가지로 추방에서 해제된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 기시 노부스케가 자유당 헌법조사회 회장에 취임하기로 결정됐다. 12월에는 자유당과 개진당이 자위대 창설 준비를 시작했다. 재군비를 위해 헌법을 개정한다면 징병제 채용이 그 핵심내용이 될 것으로 보였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은 전후 단 한번 총리가 된 가타야마 데쓰 중심의 우파 사회당이었다. 이 당이 ‘평화헌법 옹호회’를 만들었다. 좌파 사회당과 총평은 이에 대응해 우파의 이니셔티브(주도권)를 수용하고 헌법옹호국민연합 결성쪽으로 나아갔다. 내가 살던 시미즈 시에서도 54년에 들어서면서 자유당 연설회가 열렸다. 요시다 시게루 총리 이하 오노 반보쿠 등의 거물 국회의원들이 몰려들었다. 오노는 “한국에 얕보여서야 될 말인가, 쓰시마(대마) 도민은 모두 괭이, 낫을 들고서라도 조선인과 싸울 결심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야마토 정신이다”라고 목청을 높이면서 한국과의 대립을 재군비 이유로 내세웠다. 그해 2월27일, 서독 하원이 334표 대 144표로 재군비를 허용하는 헌법개정안을 가결했다. 헌법개정에 필요한 3분의 2를 9표 상회했다. 내 불안은 커져갔다. 3월16일, 시미즈항에 버금가는 현내의 어항 야이즈항의 어선 제5후쿠류마루가 (미국의) 비키니 수소폭탄 실험 때 죽음의 재를 덮어쓴 사실이 밝혀졌다. 잡은 참치들이 차례차례 처분됐다. 핵무기에 대한 반감이 고조됐다. 그로부터 1주일 뒤인 3월23일, 우리 학교 강당에서 헌법옹호국민연합 시미즈지부 결성대회가 열렸다. 중심역할을 한 사람은 사회당 시미즈지부장 이마무라 다카고로씨와 상선대학 교수 사사다 요시가쓰씨였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 신자였다. 이마무라씨 아드님이 지금 전후보상문제 관련 분야에서 활약중인 양심적인 인권변호사 이마무라 쓰구오씨다. 만나보니 아버지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강당은 만원이었고, 그 지지를 토대로 선언이 채택됐다.
“우리가 다시 저 전쟁의 참상을 겪지 않으려면 반드시 헌법 개악에 반대하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힘든 일을 해야만 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국회의원 3분의 1 이상의 반대와 국민투표 과반수 반대만 확보하면 절대로 헌법을 바꿀 수 없습니다.” 헌법옹호국민연합은 단체참가 조직이었기 때문에 개인이 참가할 수 있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그것이 시미즈평화헌법옹호회다. 나는 급우인 K와 함께 4월4일 제1회 정례회의에 참석했다. 열흘 뒤 이마무라씨를 만나러 가서 정식멤버는 아니지만 입회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헌법개정반대운동은 전국적으로 힘을 얻어갔다. 그런 가운데 6월에는 국회에서 자위대 관련 2개 법이 통과돼 보안대와 경비대는 육상·해상·항공 3자위대로 바뀌었다. 연말에는 국회에서 자위대가 합헌이라는 헌법해석이 나왔다. 이로써 해석헌법이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헌법 9조를 그대로 남겨 두고 그 토대 위에 자위대를 설치하면, 자위대는 통상적 군대와는 달리 여러가지 제약과 안전장치가 붙어 (일본)본토방위에만 전념(전수방위)하는 군사력이 돼 미국이 요청하더라도 해외 파병은 금지된다. 보수진영은 이 해석개헌 정도로 만족할 것인지, 헌법의 명문개정을 단행해 자위대를 군대로 끌어올릴 것인지 노선 선택에 몰리고 있었다.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호헌운동은 결과적으로 명문 개헌을 저지하고 해석개헌 노선을 취하도록 도운 결과가 됐다고 할 수 있다. 7월이 되자 나와 K는 원수폭금지 서명운동에 착수했다. 그런 가운데 우리 고교에 평화서클을 만들기 위한 상담을 시작했다. 상담회에는 K와 여학생 2명이 들어왔다. 여학생중 한 명은 시미즈 공산당지부 책임자의 딸인 M이었다. 7월28일 서클 첫 모임에 M은 자신의 친구 Y를 데려왔다. Y는 재일조선인으로, 본명(조선식 이름을 일본어로 발음)을 사용했다. 그 여학생은 내 생애 첫 조선인 친구가 됐다. 그때는 그 여학생 신상에 대해 자세한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20년 뒤 내가 도쿄에서 한국민주화운동연대 집회를 열었을 때 그는 자신의 딸과 함께 참석해 주었고, 그 뒤 고교 동창회에서 여러번 만났다. 그러나 내가 그에 대해 처음으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실로 첫 만남 뒤 반세기 가까이 지난 뒤였다. 그의 부모는 1920년대에 경상남도에서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와 도쿄에서 살림을 차렸다. 세번째 사내아이가 태어난 뒤 따뜻한 곳에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시미즈로 이사했고, 이사 직후 그가 시미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Y는 내가 3학년까지 다녔던 같은 소학교에 다녔다. 그는 시종일관 본명을 썼고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으나 차별받거나 이지매(해코지)당한 적 없느냐고 물으면 전시중에 소개당한 때를 빼고는 그런 것을 경험한 적 없다고 말했다. 중학교 때부터의 동급생들도 그를 활달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던 듯하다. 언니와 오빠도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유명한 활동가였기 때문에 그에게 이지매 따위의 짓을 한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미즈 조선인의 어려운 생활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지만 Y는 그런 낌새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던 여자였다. 우리 서클 첫 모임에서는 노래만 불렀다. 그때였던지 기억이 분명하진 않으나 우리는 새 동지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아리랑이나 도라지 등 조선 노래를 불렀다. Y는 이 서클에서 조선 노래를 함께 불렀을 때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고 내게 말했다. 그 뒤 곡절은 있었지만 10월16일 우리는 서클을 독서서클로 정식 출범시켰다. 나는 위원장이었고, 운영위원은 K, M 등 4명, 그리고 회계를 Y가 맡기로 했다. 서클 명칭은 내 제안대로 ‘이시와리(돌깨기)’로 정했다. 문제의 돌들을 하나하나 깨부수어서 길을 넓혀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회비는 10엔으로 했다. 첫 모임은 이시카와 다쿠보쿠에 대한 독서회로 잡고 안내문을 돌렸다. 내가 등사판을 긁어 안내문을 인쇄하고 배포했다. 모임에는 19명이 참석했으나 활발한 논의가 벌어지지 않아 낙담했다. 이런 식으로 이래 저래 활동하고 있었는데, 11월 초 내 몸에 아주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 미열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 고향 누마즈에 가서 단골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도쿄제국대 의학부를 나왔다는 이색적인 노인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의술에 절대적 자신감을 지닌 매우 박력있는 사람이었다. 이 의사는 내가 결핵 초기상태라고 진단했다. 나는 그대로 아버지 집 별채에 묵게 됐다. 그런데 약 1개월 정도 매일 주사를 맞았더니 쾌유했다면서 연말인 28이나 29일에 시미즈에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절망, 그리고 기적의 생환이었던 탓에 나는 당시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쳐 있었다. 결국 2학년 2학기는 48일간 결석했다. 중간시험도 기말시험도 치러지 못했기 때문에 2학기는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휴학처리 하지 않고 지나갔다. 병이 난 것은 운동을 막 시작한 내게 좌절을 안겼다. 나는 완전히 정치에서 손을 뗐고 서클 ‘이시와리’도 깨졌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