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공비행
얼마 전에 앨 고어가 호스트로 나온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이 칸 영화제에서 공개되었고 그 직후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지구 온난화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이 영화를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리뷰를 몇 편 읽었고 이 이슈에 대한 앨 고어의 입장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 이 영화의 내용과 주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결정적으로 나는 그 영화가 성실한 작품이며 그가 몇 년 내에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환경 재해가 닥친다고 고함을 지를 때는 분명 타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도 아니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마시길.
그건 이런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지구와 자연에 대한 태도는 바뀌었다.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자연은 폭군이었다. 우린 자연으로부터 우리의 삶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문명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지금은 정반대다. 자연은 우리의 힘으로 망가뜨릴 수 있을 정도로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이며, 지금처럼 인간의 기계문명이 날뛰면 진짜로 망가질지도 모른다. 지금도 사방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는? 그건 모두 자연의 복수다. 우리가 이렇게 기계문명을 만들지 않았다면 자연이 이렇게 난리칠 리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건 두 입장 모두 철저하게 주관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환경운동가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덜 인간 중심적이지는 않다. 사실 자연보호라는 말 자체가 인공적이다. 자연은 우리가 보존하거나 보호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수소 폭탄과 코발트 폭탄을 사방에 떨어뜨린다고 해서 자연이 자연이 아닌 어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익숙하지 않고 생존하기 불편한 다른 상태로 전환할 뿐이다. 자연 보호란 우리가 익숙하고 필요한 지금 상태의 자연을 변화 없이 보존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 혜택을 보는 건 자연보다는 인간이다.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면 몰디브와 마이애미는 물에 잠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연의 상태가 아니라 거기 살고 있는 인간들의 편리함이다. 자연이 그들의 부동산과 국가에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신경 써야 하는 건 바로 동료들인 우리 인간들이다.
하지만 자연은 단 한 번도 평안한 상태를 유지한 적이 없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까먹은 것 같은데, 19세기까지 북반부는 몇 백 년에 걸친 끔찍한 기상 이변에 시달렸다. 버지니아 울프의 유쾌한 소설 〈올란도〉 1장에서 묘사되는 런던 시대의 한파 묘사는 그렇게까지 엄청난 과장은 아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서구 문명은 사실 소빙하기라고 불리는 기상 이변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건 인류가 겪은 가장 고약한 기상 이변은 아니다. 빙하기가 끝났을 때 인류가 과연 즐겁기만 했을까? 빙하기의 끝은 대멸종의 시기이기도 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적응하고 있는 지금의 상태가 ‘정상’인 건 아니다. 그건 지구가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상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여기에 약간의 에스에프적인 상상을 더해보자. 우리의 문명이 지구의 기상 흐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힌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린 그 자연스러운 변화의 흐름을 막고 지금의 익숙한 상태를 유지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와 주변 생물의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그 흐름을 따라야 할 것인가? 아서 C. 클라크는 그의 소설 〈낙원의 샘〉에서 후자를 택했다. 다시 빙하기를 맞은 (이 소설이 쓰여졌던 80년대 초반엔 과학자들이 온난화보다 앞으로 다가올 빙하기를 더 무서워했다) 지구를 찾은 외계인 방문객이 그 이유를 묻자 슈퍼 컴퓨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답변한다. “자연과 맞서야 할 시기가 있고 따라야 할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구별을 할까. 지금은 맞서야 할 시기인가, 따라야 할 시기인가? 힌트 하나. ‘우리가 이 모든 걸 초래했다’는 답을 선택하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듀나/영화평론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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