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공비행
며칠 전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영화제의 행사 일부였던 〈그레이스 리 프로젝트〉 상영회를 보기 위해 코엑스에 갔다. 어땠냐고? 가지 말고 다음 날 방영분을 녹화하는 게 나을 걸 그랬다. 영화는 좋았지만 상영회는 최악이었다. 4:3 화면 비율의 영화를 16:9 비율로 상영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주최측의 어느 누구도 그게 잘못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뒤에서 화면 비율에 대한 항의가 있었음에도 프로젝터를 손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한심한 일이지만, 디지털 상영회에서 이런 일은 굉장히 자주 일어난다. 이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상영작이었던 〈공포의 미로〉는 정반대였다. 16:9임이 분명한 영화인데도 길쭉하게 늘린 4:3 버전이 그대로 상영되었다. 몇 십 분 동안 화면 테스트를 하고 자막 위치까지 정하는 동안 어느 누구도 그 화면이 비정상적으로 일그러졌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눈뜬 장님들인가? 얼굴이 조금만 부어도 경락 마사지를 받아야 한다느니, 다이어트를 한다느니 하며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이 상영 내내 찐빵처럼 부풀어 오른 얼굴들을 보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국제 영화제에서. 계획대로 그레이스 리가 정말로 초청되어 그 상영회를 봤다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다면 왜 내가 그 말도 안 되는 화면을 보면서 항의를 하지 않았냐고?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모 영화제에서 일그러진 영화를 트는 걸 보고 담당자에게 항의를 한 적 있었는데, 그 사람 말이 이랬다. “제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고. 다른 사람들도 불평이 없잖아요.” 이래서 나는 한국 학생들의 수학 성적이 세계 몇 위라느니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 이 나라는 기하학적 진실이 머릿수로 결정되는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면비율이 어쩌느니 하는 말을 해서 먹히기나 할까?
아직도 나는 이 둔감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화면의 노골적인 일그러짐을 인식하는 데엔 전문가의 식견이 필요치 않다. 정상적인 눈과 뇌만 있으면 눈치 챌 수 있다. 따라서 난 이 나라의 멀티미디어 환경에 사람들의 감각과 뇌를 파괴하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한다. 어떻게 봐도 이건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둔감함의 원인이 아니라 그 둔감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이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에 다 예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특정 위치에서는 예민함이 필수이다. 이 경우 영화제 담당자들이 해당된다. 정상적인 비율의 화면을 영사하기 위해서는 화면이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식해야 한다. 그것도 못한다면 나침반도 못 보는 사람에게 유람선 선장을 맡기는 격이다.
일그러진 화면은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는 않는다. 정상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을 스트레스와 분노로 시달리게 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지만. 하지만 둔감한 사람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일반 사람들과 비슷한 둔감함을 공유하면서 예민함이 필수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영국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가 항의 차원에서 가져간 끔찍한 영국 학교 급식요리를 먹고 “이 정도면 괜찮은데”라고 말했던 고위 관료가 기억난다. 영국 학교 식단 개선을 위해 필요한 사람은 제이미 올리버인가, 아니면 그 평범한 혀의 공무원인가? 과연 평범한 사람들의 예민함으로 이 나라의 인권과 평등에 대한 의미있는 토론이 가능할까? 과연 평범한 것이 언제나 면죄부가 될까?
질문이 거창해질수록 답변은 어렵다. 하지만 디지털 프로젝터의 상영 문제라면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일단 화면의 일그러짐을 눈치 챌 수 있는 눈뜬 사람들을 뽑으면 된다. 그런 사람들이 모자라 어쩔 수 없이 청맹과니들을 모아 작업을 해야 한다면 프로젝터 사용법이라도 가르치라. 어려울 것 전혀 없다. 사용서를 먼저 보고 기계의 명령에 따라 버튼 몇 개만 누르면 끝이다. 그렇게 쉽다.
듀나/영화평론가·소설가
듀나/영화평론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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