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세종, 오백년 문화의 터전을 일구다

등록 2006-09-21 21:09수정 2006-09-22 15:54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백성 편하게 한글 만들고… 유교정치의 기틀 세우고…
새 국가건설의 활력과 세종의 출중한 자질이 어울려
민족문화의 터전이 된 지성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한겨레원형질 민족문화상징 100 ⑨ 세종

말은 사람과 사람끼리 뜻을 통하는 것이고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다. 말과 글의 소중함은 그것 없이 지내지 않고서는 쉽게 깨닫지 못한다. 일제 말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던 시대를 살던 사람만큼 절실하게 우리 말과 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한글을 만든 세종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유다.

새 조선왕조가 제대로 자리잡기까지는 반세기가 필요했다. 태종이 강화시킨 왕권의 터전 위에서 세종(1418~1450 재위)은 든든한 반석을 깔았다. 집현전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백성들을 위한 시책을 강구했다. 이를 알리기 위해 책을 펴냈고, 갑인자 등의 활자 제조를 직접 지휘했다. 이런 빼어난 자질과 관심의 결정체가 세종 25년(1443) 만든 한글이다.

자기네 글을 언제 어떻게 만들었다는 확실한 기록을 가진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런데 세종은 창제 3년 뒤 펴낸 〈훈민정음〉에 이런 내용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백성들이 쉽게 익혀 쓰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라는 창제 의도가 너무도 분명하다.

또한 세종대에는 의례와 제도를 닦아 유교정치의 기틀을 세웠다. 유교 전적에서 역사 음운 지리 천문 의학 농서에 이르는 방대한 편찬 사업도 이뤘다.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농업, 의약기술, 음악, 법제가 정리되었으며 국토를 넓히고 세제를 개편해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세종의 관심은 세세한 분야까지 미쳤다. 관청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산전 30일 산후 100일의 출산 휴가를 주었고, 남편에게도 30일간 휴가를 장려했다. 지금부터 50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정병삼 / 숙명여대 교수 ·한국사학
정병삼 / 숙명여대 교수 ·한국사학

세종은 이 모든 것을 추진한 주체였다. 왕조 사회에서 모든 공적은 국왕에게 돌아가는 경향이 있으나 세종은 후대 정조처럼 스스로 뛰어난 역량을 지닌 학자였다. 유교정치에 대한 높은 소양이 있었고 역사·문화적 통찰력과 판단력을 갖추었다. 무엇보다 중국 문화에 경도되지 않는 주체성을 바탕으로 창조적 역량을 한데모아 추진한 힘과 신념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사에 남는 일은 아무에게나 기회가 오지 않는다. 능력이 출중해도 여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여건이 갖춰져도 빼어난 역량이 없으면 엮지 못한다. 새 국가 건설의 활력과 세종의 출중한 자질이 어울려 문화 성세를 이룰 수 있었다. 세종만의 업적이 아닌 국가 구성원 모두의 역량이 한데 모여 이룬 일이었다.


시대는 영웅을 낳고 영웅은 시대를 이끈다. 젊은 집현전 학자에게 보였던 뜨거운 배려와 어려운 이들에게 미쳤던 자상한 염려, 이런 사람됨이 사회적 여건과 조화를 이루어 민족 문화의 터전이 된 지성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정병삼

숙명여대 교수 ·한국사학


원효 사상과 행동의 자유인

원효(617~686)는 우리 불교사에서 첫손 꼽는 사상가지만 요석공주와 시장 거리를 돌아다녔다는 무애행(세상의 어떤 현상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따라붙는다. 승려에게 웬 공주일까. 그의 무대가 삼국간 항쟁이 치열하던 7세기 한반도였기에 생긴 일이다.

이때 불교가 들어온 지 삼백년이 되어 인도, 중국 불교가 아닌 신라 나름의 사상 정립이 절실하던 때였다. 원효는 ‘기신론’에서 불교의 이치는 하나로 통한다는 일심을 보았다. 일심은 만물의 근원이다. 무명과 번뇌를 제거함으로써 중생은 일심의 근원을 회복하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승과 속은 나뉘지 않고 초월하여 하나 되는 것이다.

자신도 얽매인 골품제의 신분 제한을 통찰한 원효가 지향한 것은 승과 속이 둘이 아닌 재가불교였다. 계율도 동기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 원효는 거리로 나섰다. 경전 못 읽는 보통 사람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을 갖도록 무애행을 실천했다. 대중들과 함께한 원효의 삶은 당대 사상적 과제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풀어낸 한 지침이었다. 무애행은 원효가 사상과 행동의 자유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황 참지성인의 본보기

성리학은 고려 말 이래 조선 초를 거쳐 사림들의 피 흘리는 노력 끝에 국가 사회의 이념적 중심으로 부상했다. 선비가 조정에 나아가 이념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 정도였다. 대학자 퇴계 이황(1501~1570) 또한 서른넷에 벼슬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사림들의 원칙주의는 여전히 기존 권신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을사사화의 싹이 보이자 퇴계는 벼슬을 내던졌다. 그의 진면목은 50대 이후 인생 후반을 오로지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길러내는 데 전념한 데서 살아난다. 성리학 체계를 독자적으로 재편했던 원동력이다.

성리학의 주축은 이기론이다. 작용하는 기와 작용 원리로서의 이를 통해 세상의 현상을 설명한다. 둘의 상호작용에 대해 퇴계는 이와 기는 섞이지 않고 상호작용한다는 이기호발설을 내세웠다. 현실에 대한 관심보다 원리를 강조한 것이다. 반면 율곡은 상대적인 기의 운동성을 강조하여 이기이원적일원론을 주장했다. 퇴계가 조선 성리학의 완벽한 기초를 닦고 율곡은 조선 성리학을 구축해냈다. 상호 인정하는 열린 관계 속에서 진리는 빛을 발한다. 퇴계는 자신의 이론적 완성 또한 기대승과의 열린 논의를 통해 이루었던 참지성인의 본보기였다. 퇴계의 학설은 조선 후기 막대한 정치·사회적 파급력이 있었으며 일본 근세 유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약용 열린 마음으로 나아가다

다산 정약용(1762~1834)은 전통 농경사회가 흔들리던 시대를 살았다. 농업사회의 합리적 질서인 성리학 대신 새 국가 이념을 찾아야 했다. 다산은 농업 중심 개혁론을 폈던 성호학파의 학문 풍토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성향이 다름에도, 기술 문명과 부국강병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북학파 사상도 적극 수용하였다.

실제로 다산은 정조 치세에 백성들의 복지 사업에 과학 지식과 재능을 발휘하였다. 한강에 배다리를 놓고 수원성을 쌓는 데 거중기를 써서 성과를 올렸다. 그는 또한 농촌경제 개혁안을 내놓아 농민이 땅을 공유하고 경작하여 균등 분배하고 선비는 정치를 맡아 인정과 덕치를 통한 민본주의 왕도 정치를 책임지는 역할 분담론을 역설했다. 18년간의 고통스런 유배시기에는 경학, 정치사상, 농업 군기 제조 의료 등 다방면의 당대 지식을 책 500여권으로 집대성하며 방대한 지식사상 체계를 집중적으로 이뤄냈다.

다산은 서학에도 관심을 가졌고 유배 때는 승려들과 교유하며 불교에 대한 편견도 버렸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노론 지식인에게서도 새 서적을 빌려 보고 같이 토론했다. 열린 마음으로 큰 이룸을 향해 나아간 지성이 큰 결과를 이뤄낸다는 사실을 실증한 이가 다산이다.

정병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