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동서횡단 /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은 동아시아를 흔들었다. 조선은 초토화됐다. 도공을 비롯한 기술자들과 지식인, 양민 등 수많은 사람들이 살륙당하고 끌려갔다. 한민족의 역사를 알려줄 기초자료들이 그때와 그 300여년 뒤 식민지배 시절에 대량으로 멸실되고 반출됐다. 우리 과거 삶의 흔적들 다수는 지금 일본에 있다.
임진왜란으로 결정타를 맞은 조선은 영·정조 시대 재기의 몸부림이 있었지만 다시 일어서지 못했으며 결국 300년 뒤 다시 침략해온 일본한테 망했다. 명도 조선을 지원한 ‘항왜원조’ 전쟁에 따른 과다지출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요동방면군의 조선파견 공백이 부른 만주지역 통제 약화가 여진족의 흥기를 불러 마침내 그들이 중원을 점령하고 청을 세웠다. 청의 건국과 함께 조선은 만주로부터 더욱 멀어졌다. 전쟁으로 덕을 본 유일한 나라는 침략자 일본이다. 일본도 파병군사의 3분의 1을 잃고 많은 전비를 썼으나 조선 수탈을 토대로 산업과 문화를 일신하고 근대를 향해 순항했다.(<중국의 역사> 데라다 다카노부, 도서출판 혜안)
일본이 조선 식민지배 40여년만에 패전으로 물러난 뒤 들어온 미국은 한반도를 그들 마음대로 분단했다. 이는 히데요시가 정유재란을 일으킨 배경과 겹쳐 보면 흥미롭다. 히데요시는 명과의 종전협상 때 조선 남부를 떼어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재침했다. 결국 히데요시가 요구했던 분할선은 350년 뒤 명나라를 대신한 미국에 의해 현실화했으며, 한반도 남부는 미국이 주도한 냉전체제하에 서부태평양의 미국 패권 최전선으로 미-일 안보·경제권역에 편입됐다.
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제목처럼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일 수 있지만 집단에 소속된 인간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 맹목적인 집단 이기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논증했다. 일본 우파들의 행보는 그 전형이다. 패전 뒤 60여년이 지났지만 일본사회의 리더들이 과거는 말할 것도 없고 당대에 자행된 범죄행위에 대해서조차 진정으로 참회했던가. 야스쿠니 신사를 찾은 그 수많은 일본사회 지도자들이 거기에 봉안된 위패의 주인공들이 조선과 중국에서 저지른 숱한 범죄행위의 희생자들, 수천만명에 달하는 희생자들 무덤이나 그들이 쓰러진 곳을 찾아 무릎을 꿇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이 ‘천황의 군대’ 총칼에 스러져간 의병들의 전적지나 수원 제암리, 진주성, 우금치, 민비 시해현장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원혼들의 땅 한 곳이라도 찾아 무릎을 꿇은 적이 있나.
아베 신조 일본총리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다는 28일치 <한겨레> 국제면 기사 바로 옆에는 중국 <중앙텔레비전>이 ‘강대국의 흥성’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고 영국 <비비시>는 이를 두고 중국 지도부가 국민에게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심리적 준비’를 하게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아베의 지지율 하락 이유는 명백하고도 단순하다. 대북 강경자세로 인기를 얻어 총리가 된 그가 고이즈미 전 총리가 망쳐놓은 중국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공약한 야스쿠니 참배도 미루는 등 본령인 우익적 자세를 누그러뜨리며 애매하게 처신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예고됐다. 조선 중국 침략을 일본국가의 발전과 영광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는 세력을 대표하는 그가 아닌가. 그런 자세로는 패권국가 중국의 등장을 반대할 도덕적 근거가 없다. 세계를 지배하는 철칙은 약육강식일 테니까.
‘일본의 전쟁책임 자료센터’ 소장 아라이 신이치는 <역사 화해는 가능한가>(미래M&B)를 썼다. 폴란드-독일 쪽을 바라보면 그럴 것 같기도 하지만 동북아는 여전히 별 가망 없어보인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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