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시사만화 작가 나지 엘 알리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의 뒷모습이다. 십자가에 가려 예수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가시 면류관을 쓴 뒤통수와 앙상한 왼쪽 옆구리, 돌멩이를 던지느라 뻗친 오른 팔이 고작이다. 도대체 왜, 십자가에 매달려 모든 것을 다 이룬 예수가 다시 몸부림치며 돌을 던져야만 했을까? 누구에게? 삽화 출처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www.palbridge.org
돌멩이를 던지는 예수와 꼬마 그림 돌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진실서 멀어질수록 잘산다는 생존전략 택한 약소국 대한민국도 뜨끔하리라
진실서 멀어질수록 잘산다는 생존전략 택한 약소국 대한민국도 뜨끔하리라
안과 밖
내 앞에 한 장의 그림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러나 예수가 축 늘어진 전형적인 앞모습이 아니라,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의 뒷모습이다. 십자가에 가려 예수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가시 면류관을 쓴 뒤통수와 앙상한 왼쪽 옆구리, 돌멩이를 던지느라 뻗친 오른 팔이 고작이다. 그 손바닥 한 가운데 여전히 못이 박혀 있다. 예수가 못과 함께 손바닥을 십자가에서 떼어 내려면 손바닥에 못이 박힐 때보다도 훨씬 더 아팠을 것이다. 도대체 왜, 십자가에 매달려 모든 것을 다 이룬 예수가 다시 몸부림치며 돌을 던져야만 했을까? 누구에게?
이라크 침략을 ‘십자군 전쟁’이라고 일컬은 미국 부시 대통령이 이 그림을 본다면, 예수가 기독교의 적, 즉 아랍인들에게 돌을 던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니다. 이 그림은 팔레스타인의 시사만화 작가 나지 엘 알리가 그렸다. 그는 이스라엘의 점령에 항거하기 위해 4만 점이 넘는 시사만화를 줄기차게 그렸고, 결국 1987년에 이스라엘한테 암살당했다고 추정된다. 작가의 개인사를 고려하면 그림 속의 예수는 이스라엘한테 돌을 던졌을 것만 같다. 그런데 그림에는 돌에 맞을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가 던진 돌이 날아가는 쪽에는 어둠이 있을 뿐이다. 돌멩이는 마치 빛이 새들어오는 구멍처럼 어둠 속에 떠있다.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심판 날 재림하실 분은 예수라고 한다. 다만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하나님 품으로 갔다고 믿는다. 알 할라지라는 철학자는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청하여 십자가형을 당해 죽음으로써 자신이 진정한 예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지 알리의 그림 속 예수. 예수와 십자가는 아랍 문화의 중요한 제재로 시대마다 출현한다. 계속 출현하는 이유는 같다. 얼굴은 바뀌어도 부정의의 속성은 똑같고, 각 시대의 부정의에 예수가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예수는 자기 뒤에 있는 사람들 편에서, 맞은 편을 향해 돌을 던진다. 십자가 뒤가 이쪽, 안이며, 돌멩이가 날아가는 맞은편이 저쪽, 바깥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안일까 밖일까?
우리가 안에 있던 때가 있었다. 일제시대. 그때는 나라를 되찾는 것이 당위이자 선이었고, 우리는 일제 침략자의 점령에 대항해 돌을 던졌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돌을 던지지 않는다. 얼굴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부정의인 미국의 이라크 점령,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대해, 그것이 약육강식의 국제질서라고 말한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은 북한 핵문제 어쩌구 하던 처음부터, 미국 부시 대통령이 총선에서 졌으니까 더욱 파병 기간을 연장해줘야 한다는 지금까지, 논리가 있어본 적이 없다. 미국 말을 안 들으면 큰 일 난다는 강박뿐. 이젠 또 레바논 파병을 하겠다고 들썩인다. 약소국으로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모든 자극에 찌릿찌릿 전율한다. 남이야 어찌되든 밖으로 밀어버리고, 우리는 우리 안에서 잘 살겠다고 생존 이외 모든 것을 포기한다.
미국 말 안들으면 큰일난다는 강박
얼마 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명분이 있고 돈이 안 든다”며 레바논 파병을 찬성했다고 한다. 레바논에 이른바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유엔의 사무총장이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반 사무총장이 미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주장을 할 우려가 없는’ 사무총장이기 때문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으로서는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서, 십자가에는 아주 작은 아이가 착 달라붙어 있다. 그의 이름은 ‘한달라’,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인데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고향에서 이스라엘에 쫓겨날 때 10살이었던 작가는, 쫓겨나던 심정을 담아 한달라를 10살짜리로 그렸고 자기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까지 한달라는 나이를 먹지 않는 걸로 설정했다. 그런데 작가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한달라는 오늘날까지 10살이다. 그는 맨발에 기운 옷을 입었으며, 대부분의 그림에서 관람자에게 등을 돌리고 뒷짐을 진 채 서있다. 한 팔레스타인 친구가 재미있는 분석을 해준 적이 있다. “한달라는 예의범절에 개의치 않아요, 오직 진실만을 따져요. 약자인 우리가 진실마저 없으면 이길 수가 없으니까요. 한달라가 바로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에서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한 아이에요. 어른들은 아무도 그 간단한 말을 하지 못했죠. 사실 그 아이는 예수예요, 진실만을 말하는 자. 그러니까 한달라는 어린 예수고, 이 삐죽삐죽한 머리카락이 가시면류관이죠.” ‘한달라’는 맛이 쓴 열매 이름인데, 어찌나 쓴지 쓴 맛의 대명사라고 한다. 한달라의 작가는 어느 누구에게나 쓴 소리를 거침없이 해댄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아랍과 팔레스타인의 나태, 부패, 탐욕, 무능력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한다. 저항이 급하므로 독립 이후로 내부 비판은 미루자는 계산 따위는 없다. 그는 내부적인 반성이, 곧 진실이 바로 저항의 힘이자 생존의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옳았다. 만화 속의 한달라가 최초로 이스라엘 탱크에 돌을 던지자, 곧 거리의 청소년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작가의 사후 이 비판 정신은 힘차게 이어지지 못했다. 파타당의 50년 장기 집권, 그리고 원리주의 하마스의 집권으로 내전 위기까지 몰린 팔레스타인의 작금의 정세가 그 결과다. 우리가 나름대로 채택한 생존 전략은, 진실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잘 산다는 것이다. 나라 밖으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안에서도 똑같다. 사회 자체가 억울하면 출세할 도리밖에는 없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그래도 우리는 ‘국익’ 앞에서는 번번이 무너진다. 진실의 편에 선 돌멩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미국이 지킨 국익은, 군산복합체의 이익이었다. 국익이라고 하면 직간접적으로 국민 모두에게 조금씩이라도 돌아가는 공평한 이익인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국가의 이름으로 누군가 이익을 취한다는 뜻이다. 국가는 저절로 국민의 것이 절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나라를 믿고 나라에 충성해온 우리는, 그럴지언정 나라에 기대는 것 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다. 될까 말까 한 국익을 위해 국민을 전쟁터에 이토록 부지런히 보낼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우리는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오래전에 도덕 같은 건 팽개쳐버렸기 때문에, 국가와는 다른 독자적인 생각을 하기를 생래적으로 두려워한다. 나라는 늘 그렇듯이 지금도 위기이나 하나밖에 없는 국토, 국민들의 생활 터전, 생계 수단, 삶의 질, 개인들의 양심마저 희생시켜 가며 생존해나간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두루뭉술하게 뭉쳐 있어서 하나의 우리 같지만 우리 안에도 겹겹의 안팎이 있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점점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다. 예수는 갈라놓는 자, 파괴하는 자이기도 하다. 포악해서가 아니라 권위와 교리에 짓눌린 보통 사람들의 고통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지금 이 시대에 출현한다면, 각기 생존의 논리로 제 국민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국가의 부정의에 맞설 것이다. 사랑의 예수에게는 바깥으로 밀려난 자들이 자기 등 뒤, 안에 둘 자들이다. 예수의 안과 밖 구분은 영 다르다. 어느 국가도 지켜주지 못하는 자들이야말로 예수에게는 돌을 던져 지켜야 할 사랑하는 자들이다. “아까 밤에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날이 추워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서리가 쳐지고 애가 저리는 느낌을 가졌어요. 왠지 모를 공포를 느꼈어요. 간혹, 특히 요즘, 폭력의 기운이 세상을 누르고 있다는 느낌, 그 기운이 내 몸으로 침범해오는 느낌에 몸서리쳐질 때가 있어요.” 올 한해 내내, 요즘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이라크, 레바논 파병을 반대하며 ‘길바닥 평화 행동’을 해온 평화운동가 ‘꼬미’님이 지난 13일의 행사를 알리며 쓴 글에서 몇 줄 따왔다. 이 글을 읽을 때 내 가슴에 예수의 돌이 날아왔다. 오수연/ 소설가.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www.palbridge.org 회원
얼마 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명분이 있고 돈이 안 든다”며 레바논 파병을 찬성했다고 한다. 레바논에 이른바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유엔의 사무총장이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반 사무총장이 미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주장을 할 우려가 없는’ 사무총장이기 때문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으로서는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서, 십자가에는 아주 작은 아이가 착 달라붙어 있다. 그의 이름은 ‘한달라’,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인데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고향에서 이스라엘에 쫓겨날 때 10살이었던 작가는, 쫓겨나던 심정을 담아 한달라를 10살짜리로 그렸고 자기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까지 한달라는 나이를 먹지 않는 걸로 설정했다. 그런데 작가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한달라는 오늘날까지 10살이다. 그는 맨발에 기운 옷을 입었으며, 대부분의 그림에서 관람자에게 등을 돌리고 뒷짐을 진 채 서있다. 한 팔레스타인 친구가 재미있는 분석을 해준 적이 있다. “한달라는 예의범절에 개의치 않아요, 오직 진실만을 따져요. 약자인 우리가 진실마저 없으면 이길 수가 없으니까요. 한달라가 바로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에서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한 아이에요. 어른들은 아무도 그 간단한 말을 하지 못했죠. 사실 그 아이는 예수예요, 진실만을 말하는 자. 그러니까 한달라는 어린 예수고, 이 삐죽삐죽한 머리카락이 가시면류관이죠.” ‘한달라’는 맛이 쓴 열매 이름인데, 어찌나 쓴지 쓴 맛의 대명사라고 한다. 한달라의 작가는 어느 누구에게나 쓴 소리를 거침없이 해댄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아랍과 팔레스타인의 나태, 부패, 탐욕, 무능력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한다. 저항이 급하므로 독립 이후로 내부 비판은 미루자는 계산 따위는 없다. 그는 내부적인 반성이, 곧 진실이 바로 저항의 힘이자 생존의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옳았다. 만화 속의 한달라가 최초로 이스라엘 탱크에 돌을 던지자, 곧 거리의 청소년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작가의 사후 이 비판 정신은 힘차게 이어지지 못했다. 파타당의 50년 장기 집권, 그리고 원리주의 하마스의 집권으로 내전 위기까지 몰린 팔레스타인의 작금의 정세가 그 결과다. 우리가 나름대로 채택한 생존 전략은, 진실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잘 산다는 것이다. 나라 밖으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안에서도 똑같다. 사회 자체가 억울하면 출세할 도리밖에는 없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그래도 우리는 ‘국익’ 앞에서는 번번이 무너진다. 진실의 편에 선 돌멩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미국이 지킨 국익은, 군산복합체의 이익이었다. 국익이라고 하면 직간접적으로 국민 모두에게 조금씩이라도 돌아가는 공평한 이익인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국가의 이름으로 누군가 이익을 취한다는 뜻이다. 국가는 저절로 국민의 것이 절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나라를 믿고 나라에 충성해온 우리는, 그럴지언정 나라에 기대는 것 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다. 될까 말까 한 국익을 위해 국민을 전쟁터에 이토록 부지런히 보낼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우리는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오래전에 도덕 같은 건 팽개쳐버렸기 때문에, 국가와는 다른 독자적인 생각을 하기를 생래적으로 두려워한다. 나라는 늘 그렇듯이 지금도 위기이나 하나밖에 없는 국토, 국민들의 생활 터전, 생계 수단, 삶의 질, 개인들의 양심마저 희생시켜 가며 생존해나간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두루뭉술하게 뭉쳐 있어서 하나의 우리 같지만 우리 안에도 겹겹의 안팎이 있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점점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다. 예수는 갈라놓는 자, 파괴하는 자이기도 하다. 포악해서가 아니라 권위와 교리에 짓눌린 보통 사람들의 고통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지금 이 시대에 출현한다면, 각기 생존의 논리로 제 국민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국가의 부정의에 맞설 것이다. 사랑의 예수에게는 바깥으로 밀려난 자들이 자기 등 뒤, 안에 둘 자들이다. 예수의 안과 밖 구분은 영 다르다. 어느 국가도 지켜주지 못하는 자들이야말로 예수에게는 돌을 던져 지켜야 할 사랑하는 자들이다. “아까 밤에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날이 추워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서리가 쳐지고 애가 저리는 느낌을 가졌어요. 왠지 모를 공포를 느꼈어요. 간혹, 특히 요즘, 폭력의 기운이 세상을 누르고 있다는 느낌, 그 기운이 내 몸으로 침범해오는 느낌에 몸서리쳐질 때가 있어요.” 올 한해 내내, 요즘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이라크, 레바논 파병을 반대하며 ‘길바닥 평화 행동’을 해온 평화운동가 ‘꼬미’님이 지난 13일의 행사를 알리며 쓴 글에서 몇 줄 따왔다. 이 글을 읽을 때 내 가슴에 예수의 돌이 날아왔다. 오수연/ 소설가.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www.palbridge.org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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