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종횡사해
개성이 북쪽에서 몇째 가는 도시인지를, 개성공단 관련 행사에서 북쪽 사람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외화벌이 사업에 10년 이상 관여해왔다는 그는 평양·남포·신의주·원산 다음에 망설이다가 개성을 꼽았다.
그의 말대로 개성은 그리 크지 않다. 해방 이후 한때 북쪽 제2의 도시였으나 남쪽이 휴전선으로 막혀 발전이 정체됐다. 각종 통계에 전체 면적 1308.6㎢에 인구가 40만명 가까운 것으로 나오지만, 그 정도 도시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개성공단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렇다는 얘기다. 전체 면적 66㎢의 개성공업지구가 성공적으로 조성되면 인구가 많게는 수십만명 늘어나 남포와 제2도시 자리를 다투게 될 것이다.
개성 지역에는 구릉지가 이어져 넓은 땅이 없는데다 안팎의 물줄기도 작고 좁은 편이다. 그래서 개성(개경)은 과거 고려 수도로서 명당이었을지 몰라도 주거지로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고 〈개경의 생활사〉(한국역사연구회 개경사연구반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는 지적한다. 가장 큰 장점은 교통이었다. 둘레 23㎞의 성에는 25개의 성문이 있어 전국으로 도로가 연결됐다. 조금 작은 한양성의 성문이 8개밖에 없었던 것과 비교된다. 특히 멀지 않은 서해 바다를 통한 뛰어난 수운은 해상세력인 왕건이 개성을 수도로 정한 주요 이유가 됐다. 개성은 ‘정몽주의 도시’라고 할 정도로 그의 체취가 곳곳에 배어 있다. 정몽주(1337~92)가 이방원 일파에게 살해당한 선죽교는 물론이고 그의 옛집에 세워진 숭양서원도 잘 보존돼 있다. 서원 삼문 뒤에는 그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학 교육기관인 성균관은 박물관으로 사용되는데, 정몽주는 성균관이 배출한 첫 박사다. 그의 죽음 위에 세워진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를 정신적 사표로 삼은 것은 역사의 역설이다. 그래서 개성의 거리에는 지금도 고려와 조선의 정신이 모두 살아 꿈틀거린다.
개성은 진취적인 고려인을 상징한다. 고려인들은 개방적 성 의식과 혼인 풍습을 가졌고 신분 차별도 조선에 비해 덜했다. 고려는 근대 이전 우리 역사에서 가장 다양한 나라와 대외관계를 유지한 나라다. ‘코리아’라는 표기가 ‘고려’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은 대양 진출을 국가 정책에서 제거함으로써 결국 서구와의 근대화 경쟁에서 뒤졌다.
개성은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가는 국도의 북한 내 출발점이다. 개성~신의주 간 거리는 400㎞로 서울~부산과 거의 같고, 4차로 고속도로로 연결되는 개성~평양 간 거리(170㎞)는 서울~대전과 비슷하다. 78㎞ 떨어진 서울과 개성을 한묶음으로 생각하면 바로 한반도의 한가운데가 되는 셈이다. 이는 통일 한반도에서 개성이 어떤 구실을 할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0월 초 열릴 남북 정상회담 때 남쪽 방북단이 육로로 이동하기로 하면서 개성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개성까지 마중 나오면 이 도시 위상은 더 높아진다. 개성(開城)은 ‘(성)문을 연다’라는 뜻이다. 개성이 옛 영화를 찾으려면 지금보다 문을 더 열어야 한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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