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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처럼 풍요 ‘공유’ 할 날 올까

등록 2007-09-14 18:12수정 2007-09-14 18:16

북유럽처럼 풍요 ‘공유’ 할 날 올까
북유럽처럼 풍요 ‘공유’ 할 날 올까
디아스포라의 눈 /

약 3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9월6일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다. 잘츠부르크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오슬로에 들른 뒤 돌아오는 길에 독일 카셀에서 열린 국제적 미술전 ‘도쿠멘타 12’를 보고 왔다.

오슬로의 인상은 세 단어로 집약할 수 있다. 춥고, 깨끗하고, 비싸다는 것이다. 하여간 추웠다. 8월이라는데 아침 기온은 섭씨 2~3도고 낮에도 10도 정도밖에 수은주가 올라가지 않았다. 미리 일기예보를 조사해 보고 코트와 스웨터를 가져갔으나, 그래도 현지에 익지 않은 몸으로는 다소 힘들었다. 거리가 깨끗한 데도 놀랐다. 공항에서 시내를 향해 가는 열차 차창에 펼쳐지는 풍경은 하늘 색도 숲 모습도 바로 상상했던 대로 북유럽적인 아름다움이었다. 한데, 그것 이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광고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미관 보호를 위한 규제가 철저하고 주민의식도 높을 것이다. 오슬로 시내에 들어서서도 그런 인상은 바뀌지 않았다. 일본을 여행한 한국인들은 흔히 일본의 거리가 깨끗하다고 말하지만 오슬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깨끗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면 나는 오히려 좀 거북해지는데, 내 파트너는 아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더욱 놀란 것은 비싼 물가였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시내까지의 열차 승차권을 구입하느라 하는 수 없이 150달러 정도에 상당하는 액수의 크로네를 인출했다. 그런데 열차표 파는 곳에 가서 나와 파트너 두 사람분의 왕복표를 사려 했더니 그것으론 모자랐다. 일본 나리타 공항에 내린 제3세계 사람들이 도쿄도로 가는 교통비가 너무 비싸 가슴이 철렁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는 노르웨이에 와 본 덕에 제3세계 사람들 심경의 일단을 느껴볼 수 있었다. 거리의 편의점에 들어가 음료수를 사려던 파트너가 비명을 질렀다. 조그만 페트병 하나가 무려 4000원쯤 했던 것이다.

내가 오슬로에 간 것은 오슬로대학 동양어학과에서 강의하기 위해서였다. 도착한 날 밤 재빨리 나를 초빙해준 박노자 교수에게, 이토록 물가가 비싼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 갈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 예,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고 그는 대답했다. 일반 노동자도 비싼 물가에 맞춰 높은 임금을 받고 있다. 물가가 높은 것은 세금이 높기 때문이고, 그 세금은 복지정책에 사용된다. 국민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오슬로의 비싼 물가는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곳의 높은 세금과 엄청난 석유 이익금이 착실하게 복지국가 재정기반으로 쓰이게 하는 안정된 정치의 역할이었다. 풍요와 안정을 나라 안팎의 이웃과 나누는 일, 극동아시아에서 그 일을 실현하기 위해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장애물이 한국의 분단과 일본의 우경화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박 교수 말로, 노르웨이의 대학진학률은 25%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풍요로운 나라에서 왜 넷에 한 사람꼴로밖에 대학에 가질 않는 것일까. 그것은 고졸 학력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이나 일본과는 대조적이다.

노르웨이의 풍요를 뒷받침하고 있는 큰 요인은 석유라고 한다. 실제로 인구 450만명인 이 나라가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은 세계 3위의 석유 수출국이다. 게다가 북해유전의 석유채굴은 사실상 국영기업체가 하고 있고, 또 장래의 자원고갈에 대비해 원유 판매수익은 원칙적으로 ‘정부연금기금’으로 적립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단지 석유자원이 있으니까 풍요롭다고 하기보다는 거기서 얻는 이익을 착실하게 복지국가 재정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안정된 정치의 역할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북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노동조합이 지닌 힘이 크고, 그것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우위를 뒷받침해 왔다. 노르웨이의 경우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노동당의 힘이 세며, 제2차 대전 뒤의 총리 점유율을 보더라도 60%를 넘는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귀족계급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 여성의 사회 진출이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는 것도 노르웨이 사회의 특징이다. 이런 풍요로운 나라이면서 외국인에게 폐쇄적이지 않다는 것은 지방자치에서 외국인 참정권을 인정하고 있는 데서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정주 외국인의 지방참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나도 참정권이 없다. 내가 그런 얘기를 하자 노르웨이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꾸밈없이 놀라는 표정을 보고 일본의 상태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일본의 풍요라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를 겨우 며칠의 노르웨이 체류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풍요로운 나라’를 지향하는 한국은 어떤가?

오슬로를 떠나기 전날 박노자 교수의 안내로 민속박물관을 견학했다. 옛날 농민 주택을 복원해 전시하고 있는 일종의 민속촌이었다. 둥근 통나무로 짠 탄탄한 구조인데 몹시 빈한했다는 인상을 떨어내지 못했다. 역사학자인 박 교수에게 물어봤다. “예컨대 17세기 무렵을 비교했을 때 당시 조선과 노르웨이 어느쪽이 더 못살았다고 보나?” 박 교수는 노르웨이 쪽이 더 가난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노르웨이에서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200만명이나 되는 이민자들이 건너갔는데 그것도 가난 때문이었다고 한다.

노르웨이는 19세기 초까지 400년에 걸쳐 덴마크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 뒤로는 스웨덴의 정치적 지배에 편입됐고, 마침내 독립을 달성한 것은 1905년이다. 그때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됐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성공회대 연구교수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성공회대 연구교수
지난 1세기라는 역사 전체를 떠올려 보면 매우 짧은 기간 노르웨이와 조선이 걸어온 길이 너무 대조적이다. 조선은 지금도 그 상처로 고통받고 있다.

현재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서로 문호를 개방하고 시민은 여권 검사도 하지 않고 자유롭게 왕래한다. 물가가 비싼 노르웨이에서 비교적 싼 스웨덴으로 물건을 사러 가는 것은 보통이라고 한다. 극동아시아에도 이런 풍요와 안정을 이웃사람들과 함께 누릴 날이 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을 위해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걸림돌이 조선의 분단과 일본의 우경화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성공회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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