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동서횡단 /
일본 월간지 〈세카이(세계)〉에는 본면 맨 앞에 독자투고란인 ‘독자담화실’이 있고 매회 세 사람 정도의 글이 실린다. 이 잡지 2007년 10월호에 나라 시에 사는 82살의 노인으로 해사(海事)대리사였다는 분이 보낸 글이 실렸다. 지난여름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관한 미국 하원의 규탄결의 채택은 일본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준 모양이지만 일본 정부는 제대로 사죄하고 보상하라는 결의의 권고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를 집권 내내 문제삼으며 집착했던 아베 신조 전 총리는 비록 앞선 시대의 일이지만 훨씬 더 광범하게 자행된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동원에 대해선 ‘광의의 강제성’이니 ‘협의의 강제성’이니 궤변을 늘어놓았을 뿐 사임할 때까지 끝내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독자투고 내용을 발췌 요약한다.
(미 하원의) 결의는 “잔학성과 규모에서 전례가 없다. 20세기 최악의 인신매매사건의 하나”라고까지 지적했다. 나는 전시 중에 내가 겪은 일을 떠올렸다. 그것은 쇼와 18년(1943년) 11월 말의 일이었다. 나는 상선학교를 갓 졸업하고 신참 3등 항해사로 가와사키기선 소속 수송선에 배속돼 있었다. 중국 다롄에서 관동군 정예 약 2000명을 싣고 격전지인 뉴기니 쪽으로 항로를 정하고 바로 남쪽으로 향했다. 그때 병사들과 함께 젊은 ‘종군’(일본군) 위안부도 80명 정도 타고 있었다. 불안한, 뭔가 두려워하고 있는 듯한 겁먹은 표정이었고 말도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무장한테서 승선자 명부를 받아 보니 위안부 대다수가 한국적으로, 20대 처녀들이었다. 거칠고 냉혹한 군조(하사관)가 인솔하며 뒤를 봐주고 있었다. 강제연행인지 임의동행인지 입을 굳게 다문 그들한테서 어떤 얘기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미국 잠수함의 습격에 떨면서 약 1개월여의 항해를 끝내고 무사히 목적지인 뉴기니 사루미에 입항했다. 그들은 쫓기듯 병사들 뒤를 따라 배에서 내렸다. 필시 ‘하기노 이에(싸리나무 집)’이라는 군전용 위안소로 보내졌을 것이다. 당시의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전쟁 수행상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군이 업자에게 요청해서 위안소를 만들도록 했다. 위안소는 군이 감독했다. 이것이 정부 조사 결과 인정한 것이므로 그걸로 충분하다. 집 안에 들어가 억지로 끌고 갔는지 그렇지 않은지 물을 필요까지는 없다. 그랬든 아니든 국가의 책임을 피할 순 없다. 위안부 문제로 일본군을 변호하는 것은 자유나 인권 억압을 긍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그것은 지금 일본과 미국이 공유하는 가치관에 반한다는 것을 아베 총리는 알아야 한다.
회고는 그렇게 끝나는데, 투고자는 총리의 침묵은 역효과를 낼 뿐이라며 권고를 받아들여 담화를 통해 나라 안팎에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지금 살아 있다면 80살이 훨씬 넘었을 그 80명의 조선 처녀 가운데 몇이나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갔을까. 일본 우파들은 치욕을 무릅쓰고 군위안부 동원의 실상을 밝힌 피해자 할머니들의 공개증언 내용을 입증할 문서들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증언의 진정성을 부인함으로써 그들을 또다시 모욕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한승동의 동서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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