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동서횡단
한승동의 동서횡단
M48A5 전차는 1950년대에 개발된 구형 전차로 미국 주방위군 예비물자였다. 제조된 지 40년이 지나 미국이 바다의 물고기집으로나 쓰겠다고 발표한 이 낡은 전차를 1990년대에 한국이 281대나 도입했는데, 그 비용은 미군이 한국에 저장하고 있던 전쟁예비물자(WRSA) 관리비를 탕감해주는 맞교환 방식으로 처리됐다. 말하자면 미군은 자신들이 치러야 할 전쟁예비물자 관리비를 한국이 내게 하고 대신 고물 전차들을 한국에 떠넘겼던 것이다. 이럴 때 한국이 내는 돈은 방위비 분담금이란 이름으로 처리된다.
미국에는 땅 짚고 헤엄치기에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수지 맞는 거래인데, 그때 들여온 M48A5 전차는 그나마 쓸 수도 없는 F급으로, 한국은 143억원을 따로 들여 B급으로 정비한 뒤 인수했다. 1974년에 체결한 ‘한국의 재래식 탄약 보급에 관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의 합의각서’(SALS-K 합의각서)가 법적 근거다. 그렇게 해서 냉전 종식과 함께 미군이 유럽에서 대거 철수할 때 본국으로 가져가야 했던 비축 탄약에다 못 쓰는 쓰레기 탄약들까지 전쟁예비물자 명목으로 한국에 대량 유입됐다. 이로 인한 마찰과 비용 문제 등으로 고민하던 미국은 WRSA 프로그램을 끝내기로 했고 2008년 말로 폐기법이 발효되는데, 문제는 그동안 비축해온 물자를 몽땅 한국 정부가 사들이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99.9%가 탄약류로 모두 5조원어치에 이른다는 WRSA 자산가치를 한국 정부는 2조8천여억원으로 평가하고 여러 비용을 상계해 1조원 미만 가격에 사들일 것이라는 보도가 최근에 나왔다.
2000년 국정감사 때 드러난 바로는, 한국의 전시비축탄이 92만4209톤에 이르고 이 가운데 63.4%(58만5848톤)가 미국 소유 전쟁예비물자탄(WRSA탄)인데, WRSA탄의 91%인 52만톤이 1970~80년대에 들여와 저장된 지 20~30년이 지난 노후탄, 도태탄이었다. 한국이 이미 막대한 돈을 들여 재생하거나 야산에서 소각처리하며 자연을 오염시키고 있다. 한국은 탄약 자급이 가능한데도 미국의 필요에 억지로 맞춤으로써 한국군 전력마저 갉아먹는 이 부적절한 WRSA탄 저장관리에 매년 3000억원 이상을 따로 허비하고 있다. 미군 WRSA탄을 전량 인수하더라도 관리비는 계속 들어간다.
SALS-K 협정은 국회 비준동의도 받지 않았고, 한-미 주둔군지위협정 규정에도 없는 불법인데도 이런 일이 계속되는 것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란 때도 드러났듯이 한국에서 미군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고, 방위산업마저 철저히 미국에 예속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약간의 전략, 작전 개념만 바꿔도 수천억 원, 장기적으로는 수십조 원 규모의 한국 돈이 그에 맞춰 추가 투입돼야 한다. 한반도 긴장은 수지 맞는 장삿거리다. 장차 한국이 미군 WRSA탄을 몽땅 떠안게 될지도 모르지만,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까지 확보한 미국은 자국군의 전세계적 작전을 위해 한국이 관리비를 대는 비축무기들을 마음대로 국외로 반출할 수 있게 돼 있다. ‘봉’ 노릇이 따로 없다.
홍근수 목사 고희기념문집 〈전환기 한미관계의 새판짜기 2〉에 실린 박기학 평화통일연구소 연구위원의 ‘미국의 방위비 분담 요구의 본질과 미군주둔비 지원 폐지의 당위성’에 자세히 정리돼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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