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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지문채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등록 2007-11-30 20:18

지문채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지문채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디아스포라의 눈 /

일본에서 지난 20일부터 외국인 입국자에 대한 지문채취와 얼굴사진 대조가 시작됐다. ‘테러리스트’ 유입과 강제퇴거 처분자의 재입국을 막는 게 목적이라고 일본 정부는 설명했다. 입국심사에 이런 조처를 도입한 나라로는 미국에 이어 두번째다.

공항 등에서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려는 외국인은 얼굴사진 촬영과 집게손가락 지문 채취에 응해야 한다. 과거의 강제퇴거자, 국제 지명수배자 등의 명단에 올라 있는 사람은 입국을 거부당한다. 지문 제공을 거부한 사람도 국외로 퇴거당한다. 다만 “특별영주자”나 외교관 등은 대상에서 제외됐다. “특별영주자”란 간단히 말하면, 재일조선인 등 1945년 이전부터 계속 일본에 거주하는 옛 식민지 출신자와 그 자손을 가리킨다. 나도 특별영주자이기 때문에 내년 봄 안식년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갈 때는 지문채취를 당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장래에도 계속 그럴지는 알 수 없다.

원래 일제시대부터 일본에 사는 조선인은 협화회(協和會) 가입을 강제당하고 협화회수첩을 상시 휴대하도록 의무화돼 있었다. 협화회란 조선인을 감시하고 노무동원하기 위한 어용단체다. 또 일제는 만주에서 항일운동과 민중의 연대를 끊어놓기 위해 농민을 집단부락에 몰아넣고 ‘양민증(良民證)’의 휴대를 의무화했다. 광산이나 군수공장에서 노동을 강요당한 중국인이나 조선인한테도 마찬가지로 증명서 휴대를 의무화하고 지문날인을 강제했다. 당국이 내건 명분은 당시는 ‘항일분자와의 싸움’, 지금은 ‘테러와의 싸움’. 대동소이하다.

일본은 1945년 전쟁에 졌지만 강화조약 체결 때까지 조선인 등 옛 식민지 출신자의 일본국적이 계속 유효하다는 공식적인 입장을취했다. 재일조선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까지는 일본국적 보유자였지 ‘외국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1947년 ‘쇼와 천황’의 마지막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발포해 옛 식민지 출신자를 “외국인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일본국적은 유효하지만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완전한 이중기준이지만 일본정부와 점령군총사령부(GHQ)가 이를 강행한 이유는 한반도에서 남북대립이 격화하면서 미국의 극동전략이나 치안상의 관점에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감시와 억압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과거엔 ‘항일분자와의 싸움’이라는 이유로, 지금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유로 외국인 지문채취를 강행하고 있다. 문제는 주민등록제도로 지문채취에 익숙해진 한국시민들이 이 제도에 대해 반발감없이 순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국에서 자신의 인권을 지킬 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타국의 인권침해에 제대로 반응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외국인등록제도에 따라 우리 “특별영주자”도 1990년대에 법률이 개정되기까지는 지문채취를 당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부모 세대부터 일본에서 살았다 하더라도 14살이 되면 외국인등록 절차를 밟아야 했다(지금은 16살).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관청 한켠의 작은 방에서 양쪽 손 열 손가락에 새까만 잉크를 바르고 지문을 찍었다. 그날부터 항상 휴대하도록 의무화돼 있던 외국인등록증에는 왼손 집게손가락 지문을 찍어야 했다. 이 굴욕적인 통과의례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자신이 일본이라는 국가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고, 항상 감시당하는 대상이라는 걸 절감하게 된다.

1980년대에 지문날인 폐지를 요구하는 투쟁이 일본 전국으로 확산됐다. 재일조선인만이 아니라 미국인과 프랑스인 등을 포함한 재일외국인들이 양심선언을 하고 지문날인을 거부했다. 막 16살이 된 재일조선인 소녀가 관청의 외국인등록 담당자 앞에서 “지문날인을 거부합니다”하고 선언하는 텔레비전 뉴스 장면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소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던 것은 탄압과 고립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용감한 첫 걸음을 내디딘 순간의, 생명의 격렬한 고동(鼓動) 때문이었다.

일본정부는 이런 저항에 과중한 처벌로 대응했다. 지문날인 거부자에 대해서는 재입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일본에 가정과 직장을 둔 사람들이라도 거부자는 한번 일본 바깥으로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긴 싸움 끝에 1991년이 돼서야 마침내 법률이 개정되고 “특별영주자”에 대한 지문날인제도는 폐지됐다. 그러나 외국인등록증 상시휴대 의무는 지금도 그대로다. “특별영주자”가 아닌 일반 재일외국인은 체류기간 갱신 때마다 지문을 찍고 있다.

그리고 지금 ‘테러와의 싸움’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일본에 새로 입국하려는 외국인의 지문채취를 시작한 것이다. 1985년에 지문날인을 거부하다 체포당한 적 있는 재일조선인 3세 장학년 변호사는 이런 말을 했다. “테러대책이라면 일본인도, 특별영주자도 지문을 채취하지 않으면 이상한 거다. 왜 외국인만 테러리스트 취급인가. 합리성이 없으며, 차별일 뿐이다.” 장 변호사 자신은 “특별영주자”이기 때문에 지금 지문을 찍어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것이 남의 일인양 해서는 해결되지 않는 중대한 인권문제라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은 믿을 수 없다” “외국인은 수상하다”라는 합리성 없는 불안이나 반감은 언제든 심각한 배외주의로 바뀔 위험성이 있다. 또 국가는 항상 국민의 그런 막연한 감정을 부추겨 이용하려 한다. 언젠가 역사가 역전해서 “특별영주자”에 대한 지문날인 강제가 부활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일본이란 나라는 근현대사를 통해 일관되게 조선인을 위험시해 왔고 그 역사를 지금도 반성하려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디아스포라의 눈 / 서경식 교수
디아스포라의 눈 / 서경식 교수
앞으로는 관광·상용·유학 등으로 일본을 찾는 한국인도 일본 공항에서 지문을 채취당하게 된다. 지금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의외로 이 제도에 반발감 없이 순응해 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의 일반시민은 주민등록제도로 지문채취에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이다. 자국에서 자신의 인권을 지킬 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타국의 인권침해에 제대로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일본만 해서는 재미 없으니 한국에서도 같은 제도를 시작해야 한다는 짓궂은 농담과 같은 ‘상호주의’ 외침이 터져나오고, 그것이 의외로 국민의 지지를 받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반인권 상호주의는 반인권의 지구화를 가속할 것이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성공회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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