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종횡사해
김지석의 종횡사해 /
“몇만년 뒤 다른 은하계에서 지구로 와서 호미니드(hominid, 사람과의 동물)의 화석 기록을 검토하는 과학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대규모의 나무와 돌 인공물을 남긴 호미니드가 지구를 점령한 지 불과 500만년 만에 새 종이 등장한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애쓸 것이다. 새 종은 화석 자동차, 제트엔진, 핵 폐기물, 컴퓨터, 플라스틱 파이프, 텔레비전 수상기 등의 층을 남겨놓았다. 이 과학자는, 호미니드 신종의 화석 뼈는 옛 종류의 것과 비슷했지만 사고 장치의 새로운 배선이 콜럼버스와 21세기의 시작 사이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확실히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인류 문명은 지난 몇백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다른 동물 세계에서 이런 격변이 일어났다면, 과학자들은 분명히 그 동물의 몸 또는 뇌 구조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신체는 수만년 전 석기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인류 문명에서 대약진이 일어난 데는 문화적 진화가 주된 역할을 했다.
본성 대 양육(Nature vs. Nurture)은 인간 행동을 설명하려는 현대 과학의 단골 주제다. 어느 쪽이 더 근본적인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유전질환에서는 타고난 유전자가 더 중요하지만, 패션의 변화에는 문화가 더 결정적이다. 수십년간의 논쟁 끝에 이제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과 환경(문화) 결정론은 모두 거부된다. 이는 현실적으로 문화가 더 중요함을 뜻한다. 유전자보다 문화가 훨씬 더 다양하고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들)>(이마고 펴냄)은 생물학의 대부분이 문화라는 정황에서 고려했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우리 문화는 일반적으로 역사라는 진화 과정을 통해서 변화한다고 강조한다.
윤리는 집단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필수적이며, 윤리를 발달시키는 능력 또한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다. 하지만 무엇이 윤리적인지에 대한 판단은 사회와 장소에 따라, 같은 사회 안에서도 본성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개개인의 행동의 결과를 예측할 능력, 공감을 위한 능력, 사회의 도덕적 기준들을 주관화하고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요구된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는 등의 일률적 규정은 이런 자유의지와 정면으로 모순된다. 인간 행동을 조건짓는 유전자-환경 상호작용 속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욕망을 조절하는 것은 자유의지의 몫이다.
인간은 유전적·문화적 진화와 유전자-문화 공진화라는 장기간에 걸친 복잡한 과정의 산물이다. 게다가 진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어 의식적 진화를 위한 노력이 더욱 중요해졌다. 인간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의식적 진화를 이뤘다. 민주적 통치, 개인의 자유, 인종 차별 반대, 종교적 관용, 여성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 보호, 세계적 분쟁의 회피, 환경 보호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할 ‘문화적 본성’이 그만큼 많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들)’이다. 인간이 본성을 발전시키는 만큼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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