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연극이란 바로 이런 것
7시간 30분의 대작으로 화제가 되어 왔던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의 <형제자매들>이 지난 20~21일 서울 역삼동 엘지아트센터에서 공연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기 직전인 1985년 초연하고 21년이 지난 지금까지 레퍼토리 명단에 올라있는 공연, 그 때 함께 준비했던 배우들이 지금까지 같은 배역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는 공연. <형제자매들>은 작품이 가진 시간의 무게만으로도 연극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피해갈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래서인지 공연 전 극장 로비에 감도는 긴장감은 다른 어떤 공연장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오후 2시 30분에 시작하여 밤늦도록 지속될 긴 공연(순 공연 시간 5시간 20분)에 대해 관객들은 조금씩 긴장했고 괜스레 허기를 느꼈다. 연극은 한 두 시간 우리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오락이 아니었던가? 무엇이 연극 앞에서 우리를 이토록 정신차리게 만드는가.
정작 연극은 아주 쉽고 편안해서 1막이 끝난 후 관객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런 얘기였어? 이런 얘기라면 밤새도록이라도 들을 수 있어.” 사람들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1941년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스탈린 시대, 러시아 집단농장 콜호스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연대기적으로 펼쳐진 이 연극에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의 사람들 이야기, 비극적이지만 그것이 세상의 진실인 이야기.
제목 <형제자매들>은 이중 삼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동지들이여, 형제자매들이여!”로 시작하는 스탈린의 연설에서처럼 시민을 끌어당기려는 정치가의 레토릭 속에 있기도 하고, 죄 없는 콜호스 위원장이 당국에 잡혀갔을 때 그를 구하기 위해 서명운동을 벌이는 극소수 사람들 사이에 있는 듯도 했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회의에 빠지는 대다수 인민들의 모습은 이 말이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 단어인지를 보여준다.
운명의 어긋남들, 그래도 처음에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동지애로 서로를 위로하지만 그 위로가 배신을 낳고 마지막에는 불신과 분열만이 남는 상황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것이 그들의 인생일 뿐이랴. 관료주의와 경제적 착취, 위선의 태양아래 이런 부조리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들처럼 ‘빵’에 굶주리지는 않을지라도 우리 사회 역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연출가 레프 도진(62)은 변해 가는 운명을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 기법을 도입했다. 하나는 다음 막에서 운명의 소용돌이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을 전 막의 마지막 장면에 홀로 세우는 것이다. 둘째는 건배를 이별의 전조로 만드는 것이다. 축하의 술, 위로의 술을 권한 자가 다음 순간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게 된다. 무대 한가운데 매달려 360도로 회전하고 아래위로 오르내리면서 모든 장면의 배경이 되어주는 뗏목 모양의 나무판은 땅에 뿌리박고 살면서도 부평초처럼 안착 못하는 이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연극은 상처와 죽음 뿐 아니라 축제와 결혼식으로 이루어졌다. 생명력 가득한 음담패설과 남녀간의 갈망이 이들의 신산스런 삶을 지켜주는 힘이고 연극을 이끌어 가는 힘이다. 웃음이 눈물을 재촉하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공연 내내 관객은 행복했다. 시간의 지속을 잊게 해주는 배우들의 열정적인 연기, 러시아의 시골 마을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 같은 배우들의 우직한 연기가 관객을 감싸준 까닭이다. 초연 때 극중 나이와 같았을 배우들이 이 연극과 한 평생을 함께 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연극이다.
노이정/연극평론가 voiv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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