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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중남미

인간 존엄성, 지진과 함께 사라지다

등록 2010-01-20 08:25수정 2010-01-20 08:34

권태호 특파원
권태호 특파원
[아이티 지진참사] 권태호 특파원, 포르토프랭스를 가다
딸 잃은 아버지, 기자들 요청에 기념사진 찍듯 포즈
길거리서 대변 보는 여인…격한 충격이 슬픔 앗아가
피에르 이마뉘엘라(9)는 포르토프랭스 외곽 코뮈노테 종합병원 1층 바닥에 담요 한 장을 깔고 분홍빛 공주 드레스를 입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다. 지진이 나던 날, 언니(18)와 여동생(3)은 숨졌다. “언니와 여동생을 어디에 묻었느냐”고 하니, “바깥에”(Outside)라는 말만 반복한다. 부모는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18일(현지시각) 찾은 이곳은 병실에 환자들을 다 수용 못해 1층 복도와 정원까지 환자들이 죽 누워 있다. 이마에는 거즈에 담당 병과와 숫자가 수인번호처럼 쓰인 채 붙어 있다. 간호사 머시 카데테는 “병원 안에만 300명 넘는 환자가 있다”고 말했다. 병원 밖 잔디 언덕에도 환자들은 끝도 없이 누워 있다. 이 병원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자원봉사자 의사들이 회진을 돈다. 아이티를 돕기 위해 온 3명의 한국인 의사, 3명의 한국인 간호사들도 이날 이곳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홍은석 의료지원팀장은 “예상은 했지만 환자들이 너무 많고 상태도 좋지 않아 당혹스럽다”며 “마취제, 거즈, 항생제, 진통제 등 기본적인 것이 태부족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폐허가 된 한 시장 건물에서 잔해를 치우는 어린이들. 포로토프랭스/AFP 연합뉴스
폐허가 된 한 시장 건물에서 잔해를 치우는 어린이들. 포로토프랭스/AFP 연합뉴스

병원 출입구 앞에는 백인 경비원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백인이나 한국인 등 낯빛이 흰 사람은 누구냐고 묻지도 않은 채 그냥 통과시킨다. 그러나 아이티 흑인들은 줄을 서서 왜 들어가려는지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고 줄을 세워 한 명씩 통과시킨다. 검은색 투피스에 모자까지 쓴 귀부인풍 흑인 여인이 ‘흰 얼굴’ 줄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 자리에서 ‘아탕, 아탕’(기다려, 기다려)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제지당한 채 남루한 차림의 흑인 줄로 가서 자기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현재 아이티의 ‘차별 아닌 인종차별’은 흔한 일이다. 전날 유엔본부를 드나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18일 임시병원에서 치료를 기다리는 어린이. 포로토프랭스/AFP 연합뉴스
18일 임시병원에서 치료를 기다리는 어린이. 포로토프랭스/AFP 연합뉴스
이날 시내에서 구조대의 구조활동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파네스 틴티스(63)는 “저 안에 내 딸(38)이 묻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딸을 잃었다는 아버지로 보기에는 너무 담담했다. 건물 더미에 묻혔다는 딸을 이야기할 때와 건물 옆에 찌그러진 자신의 픽업트럭에 대해 얘기할 때, 둘 사이에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건물 앞에 잠시 서 달라’는 기자들 요구에 지팡이를 짚고 기념사진 찍듯 자세도 취해준다. 도저히 슬픈 모습의 사진이 아니어서, ‘건물을 향해 고개를 들고 쳐다봐 달라’고 부탁하려다 그만뒀다. 가족들이 숨졌다는 아이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당혹스러움을 매번 느끼게 된다.

시테솔레유 빈민가를 지났다. 참상은 지진 이전부터 진행된 것이 틀림없다. 다 큰 여인이 차가 지나는 길거리에서 마주 보고 대변을 보고 있었다. 남자, 여자, 애나 어른이나 다 그러했다. 물보다 쓰레기가 더 많은 개천 늪에는 돼지들이 무언가를 주워먹고 있고, 주인 잃은 개들은 거리를 배회하며 쓰레기를 뒤졌다. 무너진 건물 언덕 위에는 사람들이 다닥다닥 들러붙어 망치와 곡괭이 등으로 건물 안의 철근을 자르고 있었다.


길다란 철근 세개를 구한 한 남자는 자전거에 싣고 ‘징징’ 소리를 내며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얼굴에 희색이 가득했다. 쓰레기 더미마다 시커먼 연기가 올라와 온 도시에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다. 쓰레기 더미에서 쓸 만한 물건을 빼내려 주민들이 일부러 불을 지르기 때문이다. ‘아이티에 인간의 존엄성이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느껴질 뿐이다.


오후 5시면 해가 지는 이곳은 가로등이 전혀 없어 헤드라이트 불빛만 비친다. 깜깜한 밤거리를 픽업트럭 적재고에 끼어 타고 흔들거리며 숙소인 한국인 목사님 댁으로 돌아오는데, 밤하늘에 별이 많았다.

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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