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31일 국정연설은 북한문제와 관련, 원칙을 지키면서도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흔적이 엿보였다.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 폭정(tyranny)의 종식을 강조하며 북한을 거론하긴 했지만 관심을 끌어온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공격하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부시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2006년 초 현재 전세계 인구 절반 이상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나머지 국가들에 대해서도 잊어선 안될 것"이라며 시리아, 버마(미얀마), 짐바브웨, 북한, 이란 등 5개국을 비민주주의 국가로 지목했다. 그러면서 "세계 평화와 정의에의 요구는 이들 국가의 자유를 필요로 한다"고 우회적으로 '북한의 변화'를 촉구했다. 이는 과거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지난해 1월 18일 장관 청문회장에서 북한과 쿠바, 미얀마, 이란, 벨로루시, 짐바브웨를 "이 세계에 잔존한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s of tyranny)"라고 지목했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쿠바와 벨로루시가 빠지고 시리아가 이번에 새로 들어간 점이다. 그러면서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전세계의 폭정 종식이라는 역사적이고 장기적인 목표를 추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독재정권들은 테러리스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과격주의를 조장하며 대량살상무기(WMD)를 추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볼 때 부시 대통령의 이날 대북 발언은 부시 행정부 집권 2기 출범 때와 비슷한 톤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과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일은 핵개발 문제와 연관없는 일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북한 김정일 체제를 압박하고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가 테러리스트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을 극히 우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이 이날 WMD 문제를 비중있게 거론했다는 점은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부시 대통령의 이 같은 언급은 최근 북한의 달러화 위조와 돈세탁 문제를 비롯, 마약 거래, 가짜 담배와 비아그라 생산 등을 문제삼으며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의 숨통을 죄면서 '북한은 범죄정권' 등 강경 발언들을 쏟아온 기류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물론 오는 11월 부시 행정부의 명운을 가를 중간선거가 있음을 감안, 미국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의료보장과 교육, 에너지난 해소 등 '민생직결형' 이슈들을 다루는데 역점을 둬 북핵문제가 뒤로 밀린 느낌이 없지 않다. 북한이 6자회담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연히 북한을 정면 공격함으로써 불필요한 마찰을 만들거나 회담 거부의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역사소명 부응 면피 = 부시 대통령은 "결정적인 해인 올해" 자신이 미국의 미래와 특성을 결정할 "선택"을 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갖고 자유의 적을 (끝까지) 추적할 것이냐 혹은 편안한 삶을 살겠다며 우리의 소명을 면피(retreat)하느냐"를 선택할 것을 미국민에게 주문했다. 이 선택엔 물론 이라크 주둔 미군철수 문제를 비롯한 이라크 정책, 영장없는 비밀도청, 애국법 연장 등의 각종 안보 논란이 포함돼 있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영도하는 세계의 유일한 대안은 위험하고 불안감에 휩싸인 세계"라고 이분법적 세계관을 제시하고, 자신은 세계의 안보와 평화를 위해 미국의 영도력을 발휘하라는 "역사의 소명"을 받아들여 "자유의 대의를 위해" "자신있고" "공세적이며" "대담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에 반해 일부 "책임있는 비판"과 별개인 "고립주의" "패배주의"는 현재의 안락을 찾겠다는 그릇된 생각에 젖어있고, 이러한 소명으로부터 면피엔 "평화도 영예도 없다"고 민주당측을 겨냥해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부시 대통령이 이날 미국의 국가안보 문제에 대해 "자신있고, 공세적인" 어조로 일관한 것은 점증하는 이라크 정책 비판론에 대한 해명이자 정면돌파 방침을 말해주는 것이다. 댄 바틀렛 백악관 언론담당 고문은 부시 대통령의 국정연설에 앞서 배경 설명 때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이러한 논쟁은 기왕에 있어온 것이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해 미국 외교의 전통적인 논쟁 주제인 '개입과 고립주의'를 본뜬 논쟁에 불을 지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에는 영장없는 비밀도청 문제에 대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안보를 위해서라면 용인할 수 있다"는 응답이 더 많이 나오는 현 미국민의 안보.테러 불안 심리에 대한 기대가 엿보인다. 이날 부시 대통령의 대외정책에 대한 입장 천명은 세계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민을 향한 뜻이 더 강하다. 지난해 제2기 취임식 때 북한 핵문제의 외교적 해결 추구라는 직접적인 언급이 있었던 것과 달리, 이번엔 북핵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없이 핵, 테러 등의 문제의 근본해결책으로서 자유와 민주주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북한 등의 폭정 종식 원칙을 재확인하기만 했다. 그러나 나라별 구체적인 설명에선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사례만 듦으로써 부시 대통령의 대외정책의 초점은 "과격 이슬람" 세계, 즉 대중동지역에 맞춰져 있음을 다시 보여줬다. 부시 대통령은 비판론측에서 부시 대통령의 자유의 확장 원칙의 비일관성 사례로 드는 이집트와 사우디 아라비아를 성공 사례로 꼽고, 팔레스타인에 대해선 팔레스타인 주민의 선거는 찬미하되 이 선거에서 압승한 하마스에 대해선 이스라엘 인정, 무장해제 등을 거듭 촉구했다. 자신이 폭정으로 규정한 나라의 국민과 정부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이러한 차별화는 이란에 대해 더욱 극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오늘밤 이란 시민들에게 직접 고하겠다"며 이란 국가와 이란 국민에 대한 존중, 이란인들이 "스스로의 미래와 자유를 선택할 권리"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면서 "우리 미국은 언젠가 자유롭고 민주적인 이란과 가장 긴밀한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해 이란 내부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미 경제경쟁력 제고 구상 = 부시 대통령은 연설에서 경제부문 도입 대목에서도 중국에 대한 무역보복론, 경제에 대한 정부 역할 확대론 등 민주당측을 겨냥, "보호주의" "경제적 퇴각주의(retreat)" 등으로 규정하고 이는 중앙정부 집중화, 증세 등을 낳을 것이라고 공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에 따라 자유무역, 시장개방 등의 대외 무역정책을 계속할 것이라고 재확인하는 한편, 감세 영구화, 이민법 개정, 의료보장.보험제도 개혁 등 단골 메뉴를 다시 제시했다. 지난해 같은 맥락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공화당내에서도 냉담한 반응때문에 사실상 무산된 사회보장 개혁에 대해선 의회의 거부를 탓했다. 부시 대통령이 이날 은퇴기에 접어든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들을 위한 사회보장, 의료보험, 의료보장 제도 문제를 논의할 초당적 위원회 구성을 제안한 것은 사회보장 제도 개혁 추진의 무산 경험을 감안한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중간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제2기 임기 중반에 접어든 부시 대통령이 이들 대형 사회과제를 추진할 여력이 많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날 부시 대통령이 실제 새롭게 추진할 과제로 제시한 것은 '대체에너지구상(Advanced Energy Initiative)'과 '미국경쟁력제고구상(American Competitiveness Initiative)' 2개. 전자는 미국의 "석유 중독(addicted to oil)"을 해결하고 불안한 중동지역에 대한 과도한 에너지 의존을 줄이기 위해 깨끗하고 값싸고 믿을 수 있는 대체 에너지원 개발을 위한 기술 연구 투자를 늘리겠다는 것. 대체 에너지엔 태양열, 풍력 등도 포함돼 있지만, 부시 대통령은 특히 핵에너지에 대해 "청정하고 안전하다"고 묘사, 원자력 발전소 건설 재개 방침을 거듭 밝혔다. 이와 함께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전기자동차를 위한 배터리 기술에 대한 집중 투자 방침도 밝혔다. 부시 대통령의 ACI는 인적자원 개발로 요약된다. 이를 위해 물리학 분야의 핵심 기본 연구 프로그램에 향후 10년간 투자를 배증하고, 연구개발비에 대한 세제감면 혜택을 영구화하며, 학교에서 수학과 과학 등 기초학문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사회적 보수주의도 고수 = 부시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지지층 결집에 활용했던 사회적 보수주의도 이날 연설에서 다시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재임기간 미국 사회가 "조용한 변혁" "양심의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자평하고 보수성향의 판사 임명, 줄기세포 연구 등에서 생명윤리 준수 등의 보수적 의제를 계속 추진할 것을 천명했다. ydy@yna.co.kr 조복래 특파원 (워싱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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