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상담가/춘해보건대 교수 올여름에 다녀온 파리 여행의 목적은 프랑스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나의 선택은 베르트 모리조, 카미유 클로델, 마리 로랑생, 그리고 세라핀 루이라는 19세기 여성으로, 미술사에서 배우지 못했던 예술가들이었다. 로랑생을 제외하고는 <까미유 끌로델>,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 <세라핀>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로랑생은 ‘잊혀진 여인’이라는 시의 저자이고 화가이지만 ‘미라보 다리’라는 시를 쓴 시인 아폴리네르의 연인이었다는 것이 더 알려져 있고, 조각가 클로델은 로댕의 연인으로, 화가 모리조는 마네의 모델로 더 알려져 있는 편이다. 여성들이 흔히 겪게 되는 이런 일들은 나로 하여금 작품을 직접 보고 싶게 하였다. 파리에 가서는 지하철을 타고 그녀들의 작품을 찾아 다녔다.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로댕미술관에 갔다. 팸플릿은 20개가 넘는 전시실 중에 16번 방에 그녀의 작품이 있다고 안내했으나, 실망스럽게도 3분의 1 정도만 그녀의 작품이었다. 그래도 파도 속에서 손잡고 춤추는 여성들을 생생하게 조각한 멋진 작품을 보게 되어 위로가 되었다. 베르트 모리조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루브르미술관과 오르세미술관에 갔다. 생전에 많은 그림을 그린 인상파 화가였지만 미술관에는 한두점의 그림만 있었다. 로랑생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오랑주리미술관에 갔는데 코코 샤넬을 그린 그림을 포함하여 서너점이 있었다. 그들의 작품이 모두 몇 점인지 그중 미술관에 전시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 몇 점인지 모르겠으나, 판단 기준에 의문을 가져볼 만한 숫자였다. 재미있는 경험을 한 것은 세라핀 루이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 퐁피두센터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갔을 때였다. 수십개의 전시실에서 그녀의 그림을 찾을 수 없어 안내 직원에게 문의하였다. 그는 세라핀 루이가 누구인지 몰랐고 그녀의 그림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도 묻지 않았던 것 같았다. 컴퓨터로 한참을 찾더니 11번 방에 작품 하나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무척 더운 날 고생하며 찾아갔는데 단 한점뿐이라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가보았더니 그 한점은 나뭇잎을 불타는 빨간색으로 그린 <붉은 나무>라는 작품이었고,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을 찾느라 고생한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독특하고 강렬한 그림이었다. 나는 그 작품에 끌려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나둘 와서 그 작품을 보다가 갔다. 내가 처음 그 전시실에 갔을 때는 관람객이 없었는데, 서서히 많아졌던 것이다. 내가 오래 바라보니, 지나가는 관람객들에게 볼만한 작품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 경험을 하면서 누군가가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시작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문화유산이나 예술작품과 관련하여 ‘아는 만큼 보인다’거나 ‘아는 만큼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앎은 누구의 관점에서 시작되는가? 미술사가들이 외면했던 여성 예술가들이 책과 영화를 통해 재조명되는 것은, 누군가가 그녀들의 삶과 작품을 응시했기 때문이다. 남성 예술가의 부차적인 존재로만 여겨져온 여성을 인류 예술가로 복원시킨 평등의 시선으로 말이다. “여성 사랑”은 희미해진 여성들을 바라보게 하고, 바라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더 사랑하게 된다. 사랑으로 응시하기를 계속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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