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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민예숙의 마음의 집] 배운 대로! 배운 대로?

등록 2016-11-06 17:23수정 2016-11-06 19:18

김민예숙
여성주의상담가/춘해보건대 교수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9월25일 사망한 백남기씨에게 서울대병원이 사망진단서에 사인을 병사라고 하자, 서울대 의과대학생 102명은 9월30일 성명서를 발표했다. 자신들이 법의학 강의에서 배운 내용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의대 선배들을 비판하며 배운 대로 실천하라는 요구를 한 것이었다. 이 일은 1974~1975년 동아일보가 정권의 탄압을 받자 기업들이 광고를 하지 않아 광고란을 백지로 한 채 신문을 발간할 수밖에 없게 되자, 시민들이 광고란을 사던 시절의 광고 하나를 기억나게 하였다. 서울대 법대 동기 15인이 실은 “배운 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이렇게 광고하나이다”라는 광고이다. 옳다고 배운 것을 그대로 행하지 않아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어서 당시에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았다.

같은 기간 나는 시 창작을 배우며 학교에서 좋은 시라고 배운 것을 그대로 모방하여 쓰면 졸작을 만들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배움에 대해 상반된 두 가지 경우가 재미있어 둘을 연결하여 ‘부끄러움’이라는 시를 썼다. “배운 대로 실천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실은/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배운 대로 틀에 맞춰/ 시를 쓰는 부끄러움은/ 어디에 실을 것인가// 잊지 않겠다던 약속/ 한해 두해 리본이 풀리듯 잊혀져 가고// 국어시간 외운 시들/ 한해 두해 세월 가도 잊히지 않고//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 잊지 않아야 할 것과 잊을 것/ 2016년에도 줄타기하다/ 나는 다시 부끄러움의 강에 빠지는가”

계속해서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에는 배움과 관련하여 거꾸로 가는 측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 해야 한다고 배운 것, 즉 윤리나 원칙을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표절은 지적 도둑질과 같은 것이어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도, 남의 것을 베껴서 과제로 제출하는 학생이 있다. 놀랍게도 요즘은 학생만이 아니라 교수나 공직자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본다. 수업일수를 채우지 못한 학생에게 학점을 주는 교수도 있고, 자신의 지위를 남용 내지 오용하여 경기나 시험의 등수를 바꾸게 하는 공직자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좋은 것이라고 배운 것은 그대로 모방하기도 한다. 원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주고 새로운 예를 만들어내는 과제를 내면 배운 예를 그대로 모방하여 단어만 바꾸어 제출하는 학생도 있다. 드라마나 영화도 흥행에 성공한 작품을 그대로 따라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다.

어째서 우리는 배움과 관련하여 적절하게 행하지 못할까? 아마도 노력이 어렵기 때문이고, 자신이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은 탐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옳다고 배운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충동대로 하고 싶은 욕망과 탐욕을 자제하는 노력을 해야 하고, 타인의 멋진 작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자신과 싸우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백남기씨 경우처럼 옳다고 배운 것을 지키기 위해서 외압을 견디는 용기, 또는 외압에 의해 실직하는 각오까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배움을 배움으로 살리는 데 필요한 역량들, 욕망을 자제시키는 이성과 새로움을 사랑하는 창의성을 제대로 함양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앞선 이의 작품을 디딤돌 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회를 만들어 ‘자랑스러움’이라는 시를 쓰고 싶은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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