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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밀레니얼과 Z사이] 거실로 퇴근했다 / 권도연

등록 2020-03-11 18:18수정 2020-03-12 02:08

권도연 ㅣ 샌드박스네트워크 크리에이터 파트너십 매니저

오늘도 거실로 퇴근했다. 방문을 열고 나가 거실 소파에 앉으면 그게 퇴근이었다. 퇴근이 별건가 싶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별것 같기도, 별것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벌써 15일째다.

전 직원 재택근무. 누군가에겐 부러움을 받았다. 또 어떤 이에겐 걱정을 받았다. 코로나19의 위기 경보가 ‘경계’에서 ‘심각’ 단계로 격상된 다음 날이었다. 나 역시도 얼떨떨한 마음이었지만, 익숙한 내 공간에서 편한 복장(이라고 쓰고 잠옷이라고 읽지만)으로 업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기대감이 들었다. 당시엔 곧 만나게 될 줄만 알았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몇 가지 업무 장비들을 챙긴 채 회사를 빠져나왔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사태긴 해도 적응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업무용 메신저 서비스인 ‘슬랙’을 통해 의사소통을 했고, 지메일·구글 문서·구글 드라이브와 같은 ‘지 스위트’ 도구들을 이용해 업무를 진행했고, 생산성 도구인 ‘노션’으로 필요한 정보들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똑같았다. 그동안 회사에서 노트북과 붙어있었던 시간만큼, 똑같이 노트북과 시간을 보내면 됐다. 나와 내 동료들에겐 정말로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다양한 협업 도구를 이용하는 것에 익숙한 스타트업을 비롯해, 자체적인 원격근무 시스템을 도입한 많은 기업이 빠르게 재택근무에 돌입했다. 주변 지인들은 결의를 다지듯 하나둘 키보드, 노트북 거치대, 마우스 등 업무에 대비한 물품의 구매 인증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김에 미뤄둔 책상과 의자를 구매해야겠다는 1인 가구족도 많았다. 괜히 인터넷을 살피던 중 장바구니에 엘이디(LED) 책상 스탠드를 담았다가 슬며시 내려놓았다. 본래 회사 책상에도 없던 물건이었다.

재택의 기쁨과 슬픔을 깨닫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편하고 좋은 만큼 힘들고 고됐다. 눈뜨자마자 출근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숨 돌리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출근해 있던 때의 나 자신과 방 안의 나 자신을 계속 비교하며 점검하게 됐다. 생각해보면 이 둘을 비교하는 건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조건인데, 생애 첫 재택근무에 그만 저지른 실수였다. ‘루틴’한 일상을 피할 줄만 알았는데, 더 깊은 일상으로 들어와 버렸다. 회사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우리 얼굴 보고 얘기합시다”라고 할 만한 건은 화상 회의나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됐다. 일주일 만에 화면 너머에서 팀 구성원들을 모두 만났다. 반가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처음 해본 화상 회의는 친구들과 하던 영상 통화처럼 별일이 아니었다. 동시에 말을 할 때 음성이 겹치는 점 빼곤 의견 공유에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생방송 인터뷰 중 귀여운 아이가 아빠 방 안으로 난입해 전세계 화제가 됐던 일 같은 건 생기지 않았지만, 각 집의 강아지들이 가끔 회의에 함께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재택근무에 결의를 다졌던 사람들은 점점 소통에 문을 두드렸다. ‘재택근무 잘하는 법’이나 ‘일하던 책상에서 점심을 먹지 말라’거나, ‘잠옷을 벗고 재택근무용 복장을 정하라’는 부류의 정보들을 공유했다. ‘본래 재택근무는 성악설을 믿으면 불가능한 근무’라는 글을 읽고서는 나도 모르게 실소했다. 급기야 온라인에서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온갖 심리테스트가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과 함께 사람들은 스스로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는 듯 보였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람이 겪게 된 새로운 방식의 업무 경험은 되짚어보니 모두 커뮤니케이션과 연관됐다. 재택근무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홀로 일할 수 있도록 남겨두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함께 일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된 시간이었다. 방문을 꼭 닫아두고는 바깥과 적극적으로 소통한 경험이다. 글로만 보면 마치 초능력 같아 보이는 힘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생각보다 능숙하게 해냈다.

의미 있는 경험 이면에는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 현장의 사람들이 있다. 시민들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숙연한 마음이 든다. 바깥은 어느새 봄이 와 있다. 모두가 봄을 만끽하며 내일을 준비할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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