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도연 ㅣ 샌드박스네트워크 크리에이터 파트너십 매니저
사소한 물건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한동안 조용히 내 곁을 맴돌다가, 문득 무의미함이 발각되는 순간 심판대에 오른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잣대만큼이나 어렵고도 모호하게 심판을 받는다. 관대함의 여부는 주인의 결단력에 달렸다. 그가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면 깊은 서랍 속이 행선지가 되어 곁에 남게 될 것이다. 반면 단호한 사람이라면 아쉽게도 작별을 고하게 된다.
서랍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다면 운이 좋은 경우다. 그런 경우 보통은 몇년의 시간이 흐른 뒤 ‘추억’이라는 옷을 입고 발견되어진다. 당시 주인의 마음 상태가 얼마나 말랑한지에 따라 금의환향이 될 수도, 다시금 심판대로 향하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제법 추억에 젖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그 환경이 만일 부모님께 대청소를 요청받은 주말 오전의 상황이라면, 또다시 뻔한 결론이다.
이렇게 나를 스쳐간 사소한 물건들은 꽤 의미 없어 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또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일상과 특별함의 경계를 함께해주었기 때문이다. 서랍의 깊이만큼 오히려 마음속에 가까이 위치한 물건인 경우가 많았다. 오래전 친구들과 공동구매한 책갈피가 그렇고, 학과 친구들과 기념으로 맞춰 입은 티셔츠가 그렇다. 버리자니 아쉽고, 가지고 있자니 짐이 되는 그 간질간질한 경계가 어쩌면 더 깊은 감정이지 싶다.
브랜드와 인플루언서를 막론하고 다양하고 새로운 굿즈를 출시하는 요즘이다. 사소함의 가치를 알게 될수록, 굿즈 시장 역시 일상의 틈새를 더 잘 저격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기획한다. 사람들에게 물건 그 자체의 실용성이나 가격보다는 사실 맥락과 의미가 훨씬 중요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개인 중심의 소비 패턴이 형성된 지금, 소비자는 ‘예쁜 쓰레기’(쓸모없지만 예뻐서 산 것), ‘가심비’(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 같은 신조어를 스스로 만들 만큼 사소한 소비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맥락과 의미를 입히는 방법은 몇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우선 스토리형이다. 평범해 보이는 물건에 이야기를 입히고 흥미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마음을 움직일 이야기만 준비되면 흔한 물건도 금세 사고 싶은 물건으로 전환된다. 최근 강원도 감자가 열풍을 몰며 판매된 흐름도 유사하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어려운 농민의 상황이 전달되거나, 방송 프로그램 <신상출시 편스토랑>에서 백종원 대표가 정용진 부회장에게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요청하는 장면은 포케팅(포테이토 티케팅)이라는 소비 현상을 만들어냈다.
재미에 기꺼이 소비하는 펀슈머(펀+컨슈머)도 하나의 유형이다. 기존 제품과는 한 끗 다르면서, 그 한 끗이 재미있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마음을 움직인다. 삼겹살 젤리가 별 식욕을 자극하지 않아도 구매하는 모습이나 칠성사이다가 판매한 사이다향 향수가 완판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최근 농심켈로그가 예고한 신제품 ‘파맛 첵스'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렇다. 단순히 구매가 아닌 경험을 원하는 소비자들은 크게 필요하지 않은 상품일지라도 내 감정의 재미를 위해 기꺼이 소비한다.
참여를 유도하는 소비전략도 유효하다. 스타벅스는 시즌마다 스티커를 모으면 굿즈로 바꿔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는데, 매번 대란을 일으키기로 유명하다. 무려 커피는 17잔이나 마시고 스티커를 모아야 함에도 행동 기반의 소비가 특별한 물품으로 변하는 경험을 부여한 것이다. 사소해 보이는 접근이 이제는 주객전도에 가까울 만큼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통한 물품 역시 단순할 수 있는 아이템에 트렌드와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처럼 소비한 사소한 물건들은 더 쉽게 유통기한이 다하게 된다. 맥락이 중요했기에 맥락에 빛이 바래면 빠르게 가치가 퇴색된다. 그럼에도 기꺼이 사소한 소비를 이어가는 현상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소소함이 삶에 지니는 가치를 잘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굿즈 시장의 장을 열었다고도 볼 수 있는 밀레니얼의 청년들은 오늘도 크게 필요하지 않은 물품들 속에서 행복과 삶의 의미를 느낀다. 어쩐지 열심히 돈을 모아 구매한 비싼 노트북보다 작고 소중한 서랍 속 무언가가 늘어나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