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홍 ㅣ 녹색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
요즘 진료를 하다 보면 우리나라에도 대량실업의 위기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안정된 기분으로 지내던 분들이 갑자기 불면이나 우울감을 호소해서 근황을 물어보면 일자리를 잃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다. 실직, 무급휴직, 급여 삭감, 일거리를 찾지 못하는 일용직, 자영업 실패 등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예견되었던 생활고는 이미 현실이 되어버렸다. 코로나 사태의 초입부터 이미 실직 상태에 빠진 분들도 있는데 모아놓았던 은행 잔고마저 바닥나면 이후에는 대책이 없다는 하소연에 위로의 말보다 한숨이 먼저 나올 수밖에 없다.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데에서 오는 거대한 불안과 우울함을 담아내기에 소위 ‘코로나 블루’라는 표현은 어딘지 모자라 보인다.
전례 없는 위기를 보기 좋게 활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듯하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는 말이 자주 들린다. 이들은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란 슬로건 아래에 바이오, 아이티(IT) 산업을 육성하자고 주장하는데 일견 새로운 대안인 것 같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어쩐지 익숙한 규제완화 방안들이 뒤섞여 있다. 기업들이 국민들의 건강정보가 담긴 빅데이터를 돈벌이에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고, 건강관리 서비스라는 산업을 일으키며, 원격의료를 하자는 것이다. 국민들의 보편적 권리로서의 의료가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규제를 풀어 기업들이 의료 영역에서도 비즈니스를 하게 해주자는 주장이다. 문제는 정부가 이를 전격 수용하여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 때는 ‘의료 선진화’로, 박근혜 정부 때는 ‘창조경제’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의료 민영화 패키지들이 ‘코로나 대응방안’, ‘한국판 뉴딜’로 겉옷만 갈아입힌 채 다시 추진되고 있다.
빅데이터 활용을 위한 개인정보 규제완화에는 심각한 민감정보인 의료정보도 대상으로 포함되어 있다. 병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수집되는 개인 의료정보를 가명처리만 해 기업이 활용하도록 넘기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명처리, 비식별화를 보장하는 기술은 물론 불완전할 수 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병원에 방문하면 기록이 남는 것이 싫어 진료 자체를 망설이다가 치료 시기를 놓친 분들을 숱하게 만나게 된다. 내담자 본인의 직접동의 없이는 누구도 의무기록을 열람할 수 없다고 안심시켜도 내담자들의 불안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지금도 이러한데 만약 의료정보들이 무분별하게 풀려나간다면 설사 비식별화가 된다고 해도 국민들은 불필요한 불안감을 감수한 채 진료실에 방문해야 한다. 결국 의사와 국민들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일이 된다.
건강관리 서비스는 생활습관이나 운동 등 건강과 관련된 상담을 민간기업이 서비스 상품으로 제공하도록 하자는 계획이다. 나아가 민간 보험회사가 건강관리 서비스 회사를 자회사로 차려 이러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민간 보험회사들이 건강관리 등 의료공급 영역을 잠식하기 시작하면 궁극적으로는 미국처럼 보험사가 병원 자체를 경영, 통제하는 의료 민영화 시대의 토대가 마련된다. 코로나 사태에서 국민들을 전혀 지켜주지 못한 시장 주도의 미국식 의료체계를 보고도 이러한 규제완화를 추진하는 것은 독을 약이라고 처방하는 꼴이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원격의료는 이번에 비대면 서비스라고 간판을 바꿔 달고 다시 등장했다. 국민들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학생들이 교사의 얼굴을 모니터로 봐야 하는 코로나 사태가 원격의료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라고들 한다. 주치의 제도나 의료전달체계 정비를 서둘러야 할 시점에 도리어 대형병원 쏠림을 가속화시킬 원격의료를 추진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를 위한 기회인지는 따져 물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