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정치 정치일반

슬픔에서 치유까지 ’봉하마을 대통령의 길’ 답사

등록 2010-05-22 14:31수정 2010-05-23 09:37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년을 맞아 김해 봉하마을에 노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걸었던 길을 지정해 ‘대통령의 길’이 조성되었다. 사진은 노 전 대통령이 방문객들과 함께 봉화산을 산책하는 모습. 사진제공 노무현 재단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년을 맞아 김해 봉하마을에 노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걸었던 길을 지정해 ‘대통령의 길’이 조성되었다. 사진은 노 전 대통령이 방문객들과 함께 봉화산을 산책하는 모습. 사진제공 노무현 재단
‘부엉이바위’로 이어진 삶과 죽음의 길…방문자들 ‘치유’ 공유
출발 지점 묘역 조성…추모글 1만5천개 ’노무현 정신’ 기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앞둔 21일, 김해 봉하마을 노 전 대통령 묘역 주변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햇볕에 얼굴이 발갛게 그을린 십여명의 인부들이 묘역 주변 마무리 공사에 구슬땀을 쏟았다.

시민들의 추모 글귀가 새겨진 박석(바닥 돌) 만 오천개가 ‘아주 작은 비석’ 주변에 촘촘히 놓이고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시민들의 정성과 예술가의 혼이 담겼다. 박석에 글귀를 직접 새겨 넣은 조각가 윤태중(55)씨는 “자필 박석은 공구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정으로 돌을 깨 글귀를 새겼다”고 말했다. 이 묘역이 ‘대통령의 길’의 시작이다.

‘대통령의 길’은 지난 16일 개장했다. 재단법인 ‘아름다운 봉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귀향한 뒤 자주 거닐었던 길을 지정해 만들었다. 노 전 대통령 묘역에서 시작해 봉화산 부엉이 바위를 지나 사자바위, 정토원, 봉화산 숲길, 봉하마을 논둑길 등을 거쳐 노 전 대통령 추모의 집까지 이어지는 5.3 킬로미터 구간이다. 노 전 대통령이 걷던 길에는 어떤 흔적들이 남아 있을까. 이 길을 직접 걸어보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 ‘부엉이 바위’…출발은 슬픔  

한 추모객이 부엉이 바위 근처에 설치된 울타리에 국화를 놓고 있다. 허재현 기자
한 추모객이 부엉이 바위 근처에 설치된 울타리에 국화를 놓고 있다. 허재현 기자

대통령의 길은 ‘슬픔’에서 시작한다. 묘역에서 출발한 길은 곧바로 노 전 대통령이 새처럼 몸을 날려 바위를 때렸던 봉화산 부엉이 바위로 이어진다. 죽은 이의 영혼이 맴도는 곳에는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도 맴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슬픔과 마주한다.

“옻나무가 너무 많아. 대통령님이 옻이라도 타면 어떡하나.” 순천에서 남편과 함께 봉하마을을 찾은 한세나(60)씨는 부엉이 바위 아래에서 안타까운 듯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의 몸이 부스러졌던 그 자리에 옻나무가 많은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은 부채감으로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견디지 못한 이들은 원망의 대상을 찾는다. 옻나무도 싫고 바위도 싫다. 마산에서 온 이중식(55)씨는 고개를 들어 육중한 부엉이 바위를 쳐다보더니 혼잣말을 내뱉었다. “저 바위만 없었으면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았을 텐데.” 이씨에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안타까워서 그냥 하는 말”이라고 했다. 그렇게 뭐라도 원망해야 미안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봉화산 밑에서부터 놓인 200여개의 계단을 오르면 부엉이 바위에 도착한다. 그러나 부엉이 바위는 바라볼 수만 있을 뿐 밟을 수 없다. 울타리가 바위와 사람의 경계를 가른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도 하다. 혹시라도 그의 뒤를 이을까 염려한 통제였다. 사람들은 서성거린다.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이곳도 마찬가지다.

아쉬운 이들은 울타리에 국화를 끼워 넣는다. 새로 놓은 국화 옆에는 생기를 잃은 또 다른 국화가 놓여 있다. 어떤 이들은 담배에 불을 붙여 가만히 바닥에 놓고 사라진다. 바람을 탄 꽁초들이 이리 뒹굴다 저리 뒹굴다 부엉이 바위 쪽으로 몸을 굴린다.

 

“대통령님, 노무현 대통령님”…사자바위의 메아리 

사자바위에 오른 노 전 대통령. 사진 제공 노무현 재단
사자바위에 오른 노 전 대통령. 사진 제공 노무현 재단

사자바위에 오른 사람들이 봉화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허재현 기자
사자바위에 오른 사람들이 봉화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허재현 기자

처량한 새 소리가 들려왔다. “우구구. 우구구.” 부엉이 바위 한편에 자란 소나무 위에서 들리는 소리다. 눈길을 주자 푸드덕 하며 사자바위 쪽으로 날아갔다. 우연한 일치일까. 사자 바위 쪽에서 “대통령님. 노무현 대통령님” 하고 외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부엉이 바위까지 날아왔다. 사람들이 사자바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사자바위로 발길을 옮겼다. 사자바위는 해발 140미터인 봉화산의 정상이다. 봉하들판과 마을, 멀리 화포천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이곳에 올라 “봉화산은 낮지만 높은 산”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곳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1년만에 봉하를 다시 찾았다는 한 부부가 사자바위 위에서 노 전 대통령의 새 묘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진규(45·성남시)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살아 계실 때 지켜드리지 못한 게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그에게 투표하진 않았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앞으로 그런 대통령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사자바위 한편에 놓인 국화가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흔들어댔고 봉하마을에 내걸린 노 전 대통령의 대형 그림이 먼발치에서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추모의 집 앞에 내걸린 노 전 대통령 걸개 그림. 허재현 기자
추모의 집 앞에 내걸린 노 전 대통령 걸개 그림. 허재현 기자

정토원 선진규 법사의 노 전 대통령 회고 

사자 바위에서 한참을 머문 뒤 정토원을 찾았다. 몇 걸음만 걸으니 금세 도착했다. 정토원은 봉화산 정상 부근에 자리하고 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자주 들렀던 사찰이다. 49재를 치를 때까지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이 한달여 간 머물기도 했던 곳이다.

‘부처님 오신 날’ 행사 때문에 정토원은 형형색색의 연등이 아름답게 수 놓고 있었다. 이곳저곳을 오가는 불자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마침 정토원 원장 선진규 법사가 기자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네왔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바위에서 몸을 던지기 전 찾았던 마지막 사람이다. 23일 추모법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토원 선진규 법사. 허재현 기자
정토원 선진규 법사. 허재현 기자
“(노 전 대통령이) 경호원한테 나를 두고 ‘참 좋은 분인데’ 했다더라고. 마지막으로 날 찾았으니까 나도 마지막까지 돌봐줘야지.”

선 법사는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했지만 말을 아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대신 노 전 대통령이 퇴임 뒤 어떤 말을 했는지 물었다.

“‘한다고 했는데 모두 실패작인 것 같다’고 하더라. 본인은 정말 잘하고 싶었나 보더라. 그런데 보수 세력이 너무 강하게 발목을 잡은 것 같았어. 그게 한스러웠던 것 같더라고. 하지만, 여기 와서 정치적 이야기는 거의 안 했어.”

선 법사는 노 전 대통령을 어린 시절부터 보아 왔다. 그의 청년기, 정치인으로서 부침을 겪던 시절, 대통령 시절, 퇴임 이후까지 그의 평생을 지켜보았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미래 지향적인 사람’이었다고 했다.

“늘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이었어. 어떤 원대한 이상이 있으면 그것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었지.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진 것도 어쩌면 앞만 보고 사는 사람이라 그랬을 거야. ‘아, 이번 세계 말고 다음 세계에서 뭔가 해보자.’ 그런 거 아니었을까 싶어.”

‘호미든 관음상’에도 노 대통령 숨결 

호미든 관음상. 허재현 기자
호미든 관음상. 허재현 기자
선 법사는 정토원 근처에 있는 ‘호미든 관음상’을 꼭 살펴보고 가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이곳에 들러 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했다. 호미든 관음상은 정토원에서 5분여 걸어가면 나온다. 부처가 호미를 들고 있어 ‘호미든 관음상’이라고 부른다. 1959년 불교학도 31명이 농촌 발전에 대한 기원을 담아 봉안한 불상이다.

관음상에 도착하니 손을 모아 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뙤약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날씨 탓에 주변 나무들의 잎이 바싹 말라 있었다. 산들산들 불어온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사각사각 소리를 내었다.

강찬규(44.부산시) 씨가 부인과 함께 관음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씨는 부인에게 “젊은 사람들이 투표 좀 하게 해달라고 빌자”고 말했다. 강씨는 ‘젊은층이 투표를 안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슬퍼 만 하고 있으면 뭐합니까. 투표를 해야지요.” 강씨는 항변하듯 기자에게 말했다.

강씨는 부산에 살면서 몇 번 노 전 대통령과 마주친 적이 있다고 했다. “욕도 많이 하고 실망도 많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너무 미안해요.” 결국, 강씨는 눈물 한방울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자꾸 코끝을 매만졌다. 봉화산을 오르는 이의 태반이 강씨 같은 사람이었다.

 

노 대통령 자주 걷던 숲길, ‘치유의 길’ 

봉화산 숲길을 산책하던 노 전 대통령. 사진 제공 노무현 재단
봉화산 숲길을 산책하던 노 전 대통령. 사진 제공 노무현 재단

‘호미든 관음상’을 지나면 봉화산 뒤편의 숲길로 이어진다.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을 찾은 손님들과 함께 자주 걷던 길이다. 소나무, 참나무, 편백나무 등의 나무들이 봉화산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 사이로 작은 오솔길들이 나 있는데 노 전 대통령은 이 길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

숲길로 들어서자 한결 한적하다. 이제 제대로 산책길 같은 느낌이다. ‘슬픈’ 기운에 푹 빠져 어지럽던 마음이 잔잔해지는 느낌이다. 뻐꾹 뻐꾹 지저귀는 뻐꾸기 소리, 사르르 소리를 내며 잎사귀들이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운다. 사람 소리 나지 않는 오솔길을 터벅터벅 걷다 보면 어느새 세상 시름이 훌쩍 달아난 듯하다. 노 전 대통령도 이 길을 걸으며 상처받은 심신을 위로했을 게다. 봉화산 숲길은 ‘치유의 길’이었으리라. 

1시간여 숲길을 걸으면 아름다운 화포천과 봉하마을 논둑길이 나온다. ‘봉화산 숲길’ 안내 책자는 이 논둑길을 ‘노 전 대통령과 권양숙씨가 젊은 시절 연애를 하던 데이트 코스’로 소개해 두었다.

 

노 대통령 부부 연애 시절 데이트 코스였던 논둑길 

 

봉하마을 논둑길. 노 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씨가 젊은 시절 데이트하며 이 길을 걸었다. 허재현 기자
봉하마을 논둑길. 노 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씨가 젊은 시절 데이트하며 이 길을 걸었다. 허재현 기자
폭 2미터가량의 좁은 둑길을 걷는데 아름다운 봉하마을의 무논에서 노니는 백두루미가 눈에 들어왔다. 멀찍이서 봉화산 사자바위가 이 모습을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밤이 되면 ‘반딧불이’가 백두루미 대신 무논을 거닐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귀향한 뒤 봉하마을이 생태농업을 시작하면서 생긴 변화라 했다.

아침에 출발했던 산책길이었는데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논둑길 초입에 위치한 자광사에 들르니‘공양밥’을 한 움큼 내온다. 이곳도 노 전 대통령의 발길이 멈추었던 곳이다.

자광사를 돌보고 있는 박아무개(50)씨도 노 전 대통령을 여러 번 보았던 이다.

“(노 전 대통령이) 아침 9시쯤 되면 비서관하고 이곳을 자주 지나갔어요. 어떤 때는 권양숙 여사랑 같이 걷기도 했고요. 인자하고 자상한 게 텔레비전에 나왔던 모습 그대로였어요.”

박씨의 이야기를 한참 듣다 보니 가득 찼던 밥공기를 벌써 비웠다. 박씨가 아쉬운 듯 자광사 앞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노 전 대통령을 기억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은 길손을 만나면 그렇게 노 전 대통령 이야기를 꺼내주었다. 그들에게 노 전 대통령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멀리서 그가 부른‘상록수’가…아직 보내지 못한 사람들의 ‘사노곡’  

사자바위에 놓인 국화 한송이. 허재현 기자
사자바위에 놓인 국화 한송이. 허재현 기자

봉하마을 앞에 다시 도착하니 추모객들의 숫자가 배로 많아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의 집을 들르기 위해 사람들이 빼곡히 줄을 섰다. 추모의 집 앞 너른 마당에는 노 전 대통령의 얼굴이 담긴 대형 걸개 그림이 세워져 있다. 활짝 웃는 노 전 대통령이 오른손을 흔들고 있는 그림이다. 주름진 얼굴이 푸근하다.

멀리서 ‘상록수’ 노래가 들려왔다. 노 전 대통령이 직접 부른 노래였다. 노 전 대통령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노래와 그의 글, 그의 목소리는 남았다. 봉하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여전히 노 전 대통령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애끓는 ‘사노곡’이 대통령의 길 이곳저곳에 구슬프다. 김해/ 글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영상 김도성 피디 kdspd@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정치 많이 보는 기사

‘부정선거 전도사’ 황교안, 윤 대리인으로 헌재서 또 ‘형상기억종이’ 1.

‘부정선거 전도사’ 황교안, 윤 대리인으로 헌재서 또 ‘형상기억종이’

선관위 “선거망 처음부터 외부와 분리” 국정원 전 차장 주장 반박 2.

선관위 “선거망 처음부터 외부와 분리” 국정원 전 차장 주장 반박

오세훈, ‘명태균 특검법’ 수사대상 거론되자 ‘검찰 수사’ 재촉 3.

오세훈, ‘명태균 특검법’ 수사대상 거론되자 ‘검찰 수사’ 재촉

이재명 “국힘, 어떻게 하면 야당 헐뜯을까 생각밖에 없어” 4.

이재명 “국힘, 어떻게 하면 야당 헐뜯을까 생각밖에 없어”

이재명, 내일 김경수 만난다…김부겸·임종석도 곧 만날 듯 5.

이재명, 내일 김경수 만난다…김부겸·임종석도 곧 만날 듯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