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 추모 행사가 열린 23일 오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쓴 추모객들이 가득하다. 김해/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평생 땅 일궈온 어머니, 굵은 빗방울속 인파에 “개구리알 맹키로 꽉 찼네”
이편 저편 걷어찬 공 뜨겁게 껴안고 바닥 뒹군 노무현은 ‘바보 골키퍼’
공포와 불안 강요하는 무거운 하늘 우산 기둥들이 떠받치는 듯
이편 저편 걷어찬 공 뜨겁게 껴안고 바닥 뒹군 노무현은 ‘바보 골키퍼’
공포와 불안 강요하는 무거운 하늘 우산 기둥들이 떠받치는 듯
어머니와 봉하마을 찾은 신용목 시인
“개구리알 슬어논 거 맹키로 콰악 찼네.” 아침부터 봉하 마을에 밀려드는 차량과 인파는 굵은 빗방울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임시주차장을 빼곡히 메운 차들을 보고 어머니가 한 말씀 던지셨다. 물기를 머금고 출렁이는 모양새가 정말 개구리알을 닮아 있었다. 또한 4대강 사업으로 터전을 잃은 개구리들의 눈물이 저 모양일까, 괜한 생각이 따라왔다. 멀찌감치 차를 받쳐두고 무릎이 불편한 어머니와 반십리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노란 풍선과 팔랑개비와 펼침막이 사람들과 함께 늘어서 있었다. 창원 둘째네에 가는 길에 함께 들러보자는 막내의 말에 별말 없이 끄덕이셨지만, 소백산맥 동쪽 능선에서 땅을 일구며 평생을 보낸 어머니에게 정치인이란 그저 높은 사람이었고 정치란 그분들이 하는 큰일일 뿐이었다.
[녹화방송 1부]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추도식
[녹화방송 2부]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추도식
“똑 우리 옛날 집 보는 것 같네.” 대통령 당선자 특집 프로그램을 보던 어머니의 말이었다. 경운기 한 대 선 추레한 마당에 농사꾼으로 늙은 그의 친지가 브라운관에 들어와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이웃과 우리 마을과 똑같은 행색의 풍경. 아주 오랫동안 ‘통치’는 우리와 다른 마을에서 우리와 다른 교육을 받고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는 치들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먼 남쪽 마을의 주소를 적고는 부끄러운 시집을 동봉하기도 하였다. ‘마을 이장 선거에 출마해주세요’라는 실없는 인사와 함께. 열시도 못 되었는데 벌써부터 긴 줄이 늘어선 전시관과 추도의 집을 지나 사저 앞에 다다른 어머니의 관람평은 이랬다. “거창하다고 난리를 치더만, 살던 집이 저기 다가?” 사실 가로세로 2미터 남짓의 묘석에 새겨진 ‘대통령’이라는 전직명만큼 그를 메마르게 설명하는 이력은 없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력보다 신뢰를, 돈보다 사람을 생각하는 한 ‘시민’을 알아야 했다. 그보다 먼저, 마을 구판장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놓고 막걸리 잔을 들고 있는 주민을 만나야 했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대한민국 정치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하는 축구경기와 비슷하다. 보수 세력은 위쪽에, 진보 세력은 아래쪽에서 뛴다. 진보 세력은 죽을 힘을 다해도 골을 넣기 힘들다. 보수 세력은 뻥 축구를 해도 쉽게 골을 넣는다.”(<운명이다>, 204쪽) 그렇다면 그는 최전방에서 한 번의 기회를 승리로 연결시키는 공격수였나? 아니다. 그는 골키퍼였다. 이편이건 저편이건 바쁘게 걷어차는 공마저 뜨겁게 껴안고 바닥에 뒹구는 사람. 급기야 그 공과 함께 진창에 쓰러져 잠이 든 ‘바보’였다. 누군가 칼을 쥐여주었을 때 그 칼을 놓고 따뜻한 손을 내밀었던 바보 말이다. 묘역 예비 참배소 앞에서 어머니의 옷은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내친김에 정토원까지 오르고 싶은 건 어머니의 욕심이었다. 둘째형이 먼저 어머니를 모시고 귀가하기로 하였고, 나는 노란 행렬 속에 머물다 곧장 서울로 가기로 했다. “대통령까지 해묵고, 사람들이 이리 좋아하는데, 와 죽었을꼬?” 내가 한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바라볼 때, 어머니는 봄 들에 그득한 논물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질문은 대답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임시주차장까지 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배웅하듯, 저 물들은 계곡부터 강에까지 손을 잡고 흐르고 있었다. 폭포의 낭떠러지에서도 단 한 번 놓지 않은 손. 그리고 지금 봉하의 비로 인해, 하늘에서부터 그 손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의 친필처럼, 어떤 칼로도 자를 수 없는 물의 연대를 생각했다. 어느새 빗방울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흘러다녔다. 아이의 손에 들린 하얀 국화가 시민 조문객의 흰나비처럼 추도식장 쪽으로 길게 날고 있었다. 정토원을 오르다 나는 부엉이바위를 곁두고 숨을 돌렸다. 저 아래 묘역에 시민들이 기부한 1만5000여개의 박석들이 하나하나 집처럼 박혀 사이사이 길을 연 마을을 그려놓고 있었다. 그가 바랐던 세상은 돈과 권력이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 소통과 반성 속에서 사람과 어울리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과식증에 걸린 권력이 불감증에 걸린 정책을 앞세워 공포와 불안을 강요하는 마을과는 다른 지도를 가졌다. 가끔씩 나에게 찾아오는 분노의 정체를 나는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돈 없고 빽 없고 힘없다는 이유로 평생을 죽은 듯 당하고만 살아야 했던 내 어머니의 삶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곱게 단장하고 참 먼 데를 쳐다보네.” 생가에 걸린 그의 결혼사진을 보고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던 어머니의 삶이 거쳐온 그 먼 데. 본행사를 앞두고 봉하는 노란 광장이 되어 출렁이기 시작했다. 마을이든 산이든 둥글게 비를 두른 우산이 하나씩의 기둥이 되어 무거운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밥때가 되었고 나는 약속한 원고를 시작할 겸 노란 천막 하나를 골라 들었다. 잔치국수 한 그릇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아이 하나가 신기한 듯 소리치며 달려갔다. “저기 민들레꽃이 피었어요.” 노란 우산이 멈춰선 곳에는 외진 처마를 빌려 용케도 여태 하얀 보풀을 단 민들레 한 포기가 있었다. 그건 꽃이 아니라 ‘꽃씨’라고 일러줄 참이었지만 아이가 허리를 툭 꺾어 돌아왔을 때, 홀씨들은 모두 비바람에 흩어져 날아가버린 뒤였다. 아이의 얼굴에 스치는 낭패감에 잠시 웃음을 나눌 수 있었다. 그것이 봉하 마을의 봄일지도 모른다. 모가지를 자를 수는 있지만 모가지를 가져갈 수는 없는 것. 마른 줄기의 빈 마디를 남기고 사라져 더 많은 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봄. 누구도 그 고삐를 두를 수 없는 바람이 노란 꽃잎처럼 일고 있었다.
“똑 우리 옛날 집 보는 것 같네.” 대통령 당선자 특집 프로그램을 보던 어머니의 말이었다. 경운기 한 대 선 추레한 마당에 농사꾼으로 늙은 그의 친지가 브라운관에 들어와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이웃과 우리 마을과 똑같은 행색의 풍경. 아주 오랫동안 ‘통치’는 우리와 다른 마을에서 우리와 다른 교육을 받고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는 치들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먼 남쪽 마을의 주소를 적고는 부끄러운 시집을 동봉하기도 하였다. ‘마을 이장 선거에 출마해주세요’라는 실없는 인사와 함께. 열시도 못 되었는데 벌써부터 긴 줄이 늘어선 전시관과 추도의 집을 지나 사저 앞에 다다른 어머니의 관람평은 이랬다. “거창하다고 난리를 치더만, 살던 집이 저기 다가?” 사실 가로세로 2미터 남짓의 묘석에 새겨진 ‘대통령’이라는 전직명만큼 그를 메마르게 설명하는 이력은 없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력보다 신뢰를, 돈보다 사람을 생각하는 한 ‘시민’을 알아야 했다. 그보다 먼저, 마을 구판장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놓고 막걸리 잔을 들고 있는 주민을 만나야 했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대한민국 정치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하는 축구경기와 비슷하다. 보수 세력은 위쪽에, 진보 세력은 아래쪽에서 뛴다. 진보 세력은 죽을 힘을 다해도 골을 넣기 힘들다. 보수 세력은 뻥 축구를 해도 쉽게 골을 넣는다.”(<운명이다>, 204쪽) 그렇다면 그는 최전방에서 한 번의 기회를 승리로 연결시키는 공격수였나? 아니다. 그는 골키퍼였다. 이편이건 저편이건 바쁘게 걷어차는 공마저 뜨겁게 껴안고 바닥에 뒹구는 사람. 급기야 그 공과 함께 진창에 쓰러져 잠이 든 ‘바보’였다. 누군가 칼을 쥐여주었을 때 그 칼을 놓고 따뜻한 손을 내밀었던 바보 말이다. 묘역 예비 참배소 앞에서 어머니의 옷은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내친김에 정토원까지 오르고 싶은 건 어머니의 욕심이었다. 둘째형이 먼저 어머니를 모시고 귀가하기로 하였고, 나는 노란 행렬 속에 머물다 곧장 서울로 가기로 했다. “대통령까지 해묵고, 사람들이 이리 좋아하는데, 와 죽었을꼬?” 내가 한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바라볼 때, 어머니는 봄 들에 그득한 논물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질문은 대답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임시주차장까지 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배웅하듯, 저 물들은 계곡부터 강에까지 손을 잡고 흐르고 있었다. 폭포의 낭떠러지에서도 단 한 번 놓지 않은 손. 그리고 지금 봉하의 비로 인해, 하늘에서부터 그 손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의 친필처럼, 어떤 칼로도 자를 수 없는 물의 연대를 생각했다. 어느새 빗방울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흘러다녔다. 아이의 손에 들린 하얀 국화가 시민 조문객의 흰나비처럼 추도식장 쪽으로 길게 날고 있었다. 정토원을 오르다 나는 부엉이바위를 곁두고 숨을 돌렸다. 저 아래 묘역에 시민들이 기부한 1만5000여개의 박석들이 하나하나 집처럼 박혀 사이사이 길을 연 마을을 그려놓고 있었다. 그가 바랐던 세상은 돈과 권력이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 소통과 반성 속에서 사람과 어울리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과식증에 걸린 권력이 불감증에 걸린 정책을 앞세워 공포와 불안을 강요하는 마을과는 다른 지도를 가졌다. 가끔씩 나에게 찾아오는 분노의 정체를 나는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돈 없고 빽 없고 힘없다는 이유로 평생을 죽은 듯 당하고만 살아야 했던 내 어머니의 삶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곱게 단장하고 참 먼 데를 쳐다보네.” 생가에 걸린 그의 결혼사진을 보고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던 어머니의 삶이 거쳐온 그 먼 데. 본행사를 앞두고 봉하는 노란 광장이 되어 출렁이기 시작했다. 마을이든 산이든 둥글게 비를 두른 우산이 하나씩의 기둥이 되어 무거운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밥때가 되었고 나는 약속한 원고를 시작할 겸 노란 천막 하나를 골라 들었다. 잔치국수 한 그릇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아이 하나가 신기한 듯 소리치며 달려갔다. “저기 민들레꽃이 피었어요.” 노란 우산이 멈춰선 곳에는 외진 처마를 빌려 용케도 여태 하얀 보풀을 단 민들레 한 포기가 있었다. 그건 꽃이 아니라 ‘꽃씨’라고 일러줄 참이었지만 아이가 허리를 툭 꺾어 돌아왔을 때, 홀씨들은 모두 비바람에 흩어져 날아가버린 뒤였다. 아이의 얼굴에 스치는 낭패감에 잠시 웃음을 나눌 수 있었다. 그것이 봉하 마을의 봄일지도 모른다. 모가지를 자를 수는 있지만 모가지를 가져갈 수는 없는 것. 마른 줄기의 빈 마디를 남기고 사라져 더 많은 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봄. 누구도 그 고삐를 두를 수 없는 바람이 노란 꽃잎처럼 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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