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거꾸로 공부법
이범의 거꾸로 공부법 /
‘스킬셋’(skill set)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업무를 해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기능으로는 안 되고 여러 기능들의 집합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 스킬셋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가장 광범위한 스킬셋들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요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국·영·수’이다.
나의 예를 들어보자. 과학 강사로서 성공한 것은 여러가지 기능들이 결합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과학의 여러 과목을 두루 이해하는 것은 과학고와 대학원 전공(과학사·과학철학)의 영향이다. 가르칠 내용을 해체해 내 나름대로의 순서와 방식대로 재구성하는 기능은 학부 시절에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익힌 것이고, 조리있게 말하는 기능은 대학원 시절에 갖춰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여기에 ‘영어’라는 스킬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었다면? 나는 인터넷으로 미국 학생들에게 SAT나 AP 강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입시가 워낙 국·영·수 중심이다 보니, 국·영·수를 희생양삼아 입시위주 교육을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국·영·수는 분명 가장 중요한 과목임에 틀림없고, 교육선진국 어디를 봐도 국·영·수가 중시되지 않는 나라는 없다. 단지 이것이 주입식 교육과 교과 운영에 대한 관료적 통제로 인해 왜곡돼 있을 뿐이다. 학교에서 국어를 초중고 12년간 배우지만, 논술문 지도 한번 제대로 받기 어려운 현실 아닌가! 영어는 아직까지도 일본식 문법공부에 밀려 말하기·듣기·쓰기 훈련은 뒷전이 되어버리고, 수학도 그저 공식과 방법을 주입하고 이를 틀에박힌 문제들에 적용하여 답을 구하는 훈련만 반복시키다 보니 폭넓은 응용능력이나 수학적 모델링 능력이 키워질 리 없다.
이렇게 현재의 공교육이 놓쳐버린 영역을 체크하고 있는 시험이 바로 논술고사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현재의 논술고사는 사교육 수요를 키우고 있다. 하지만 내가 논술고사를 폐지하자고 차마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논술은 주입식 교육으로 인한 공백을 정확히 겨냥한 시험으로서 일종의 보완적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제대로 된 국어와 수학 공부는 공교육에서 손놔버린 논술(언어논술·수리논술)에서 평가되는 셈이다. 만일 교육선진국들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거의 모든 과목에서 ‘강의-숙제(읽기·쓰기)-발표-토론’이 반복되고 1년에 한두번씩 공식적인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훈련을 받는다면, 그네들처럼 별도의 대입 논술교육이 필요없을텐데 말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대학생들의 진로 지도를 하는 컨설턴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는, 대학에 입학한 강남지역 학생들과 타지역 학생들을 비교해 보면 다른 능력 차이는 없는데 다만 ‘영어’에서 평균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효율적인 영어교육이 이뤄지지 않은 결과, 별도의 특별 대책을 동원한 집안의 아이들만 영어를 잘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같은 세계화 시대에 이처럼 일부의 아이들만 영어를 포함한 스킬셋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범 와이즈멘토 이사, EBS·곰TV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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