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10. 어떤 차이가 차별을 낳을까? - 왕따의 사회학
11. 프랑크족의 침입에서 이슬람인들이 배운 것은?
12. 설득의 진화 - 수사학에서 너지(Nudge)까지 1096년 7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찾아들었다. 바다 건너편 아랍세계는 긴장했다. 이 무리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종잡지 못했던 탓이다. 군대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설펐다. 수백 명의 기사가 있기는 했지만, 여자와 아이들, 누더기를 걸친 노인들까지 섞여 있었다. 등 뒤에는 하나같이 십자가가 기워져 있었다. 무리는 잔인했다. 아마도 식량이 없었던 모양이다. 가는 곳마다 약탈이 일어났고 심지어 어린아이를 잡아 불태우기까지 했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일까? 왜 이토록 흥분해 있을까? 아랍인들은 상황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십자군 전쟁’으로 알려진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랍인들로서는 기독교도들이 이슬람 세계를 종교적인 이유로 쳐들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같은 신이다. 그래서 이슬람은 기독교를 형제 종교로 여겼다. 십자군이 내세우는 ‘예루살렘 회복’도 희한한 소리이긴 마찬가지였다.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한 지는 한참 되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그 시대 가장 안전한 길로 손꼽혔다. 그런데도 왜 기독교인들은 흥분해서 쳐들어왔을까?
십자군 전쟁은 임진왜란과 꼭 닮은꼴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맏이를 뺀 아들들은 땅을 물려받지 못했다. 따라서 오갈 때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이루자, 숱한 무사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그들에게 나눠줄 땅도 부족했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징비록〉
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 아침이슬 <징비록>
서애 유성룡 지음, 김문수 엮음. 돋을새김 정치가들은 불안한 상황을 놓치지 않고 이용한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위기에 빠진 기독교 세계인 비잔틴 제국을 돕고 성지를 지킨다는 이유로 십자군을 모았다. 당연히 사령관은 교황이 될 터, 기회를 살리면 유럽의 왕들을 단번에 휘어잡아 버릴 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속내도 비슷했다. 침략이야말로 자기 몫을 달라 외치는 전쟁 기술자들을 나라 밖으로 쫓아낼 기회 아니던가.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승부가 뻔했다. 한쪽은 전쟁에 몸이 단 집단이었다. 유럽의 기사들은 두꺼운 철갑옷으로 몸을 둘렀다. 심지어 말까지도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슬람인들은 탱크를 처음 본 보병들처럼 두려움에 떨었다. 조선의 상황도 비슷했다. 병사들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적을 당해내지 못했다. 군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도망가느라 바빴다. 이슬람인들도 밀리고 또 밀릴 뿐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무기가 약해서 당하기만 했을까? 아랍의 작가 아민 말루프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는 내부 고발자의 시선으로 아랍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십자군에게 당한 까닭은 아랍세계가 하나로 뭉치지 못한 탓이었다. 아랍의 군주들은 십자군 침략을 되레 반기기까지 했다. 당시 예루살렘 부근 지역은 다툼이 아주 심했다. 십자군과 손을 잡으면 이웃 왕들을 쉽게 누를 터였다. 그래서 십자군과 아랍 군주가 협력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아가, 이슬람의 가장 큰 적은 이슬람 안에 있었다. 암살자 집단 아사신은 아랍의 지도자들을 끊임없이 노렸다. 장기나 살라흐딘(살라딘) 같은 아랍의 영웅들도 이들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조선은 또 어떤가. 유성룡이 <징비록>에 비친 모습은 한심하기만 하다. 국왕이 북쪽 끝 의주까지 내몰렸는데도, 관료들 사이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영의정이 임명됐다 하루 만에 쫓겨나는 일까지 있었다. 이순신 같은 장수들도 사형 문턱까지 내몰렸다. 십자군의 지배는 120년 가까이 이어졌다. 임진왜란도 7년을 끌었다. 전쟁으로 아랍세계와 조선은 완전히 결딴났다. 십자군은 식인종으로 여겨질 만큼 잔혹했다. 마라라는 도시에서는 사람을 꼬챙이에 꽂아 굽고 시체를 먹을 정도였다. 한양을 다시 되찾았을 때, 사람들은 시체 썩는 냄새에 돌아다니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역사는 흐르는 법이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지 천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사람들은 무엇을 배웠을까? 안타깝게도 서구 세계는 별로 깨달은 바가 없는 듯하다. 소설과 영화 속에 십자군 전쟁은 ‘로망’으로 여겨진다. 신앙과 정의를 위해 칼을 뽑아든 잘생긴 기사들. 약탈과 범죄를 반성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듣기 어렵다. 아랍인들은 또 어떤가? 꽤 오랫동안 그네들에게 십자군 전쟁은 ‘프랑크족의 침입’일 뿐이었다. 숱한 전쟁 가운데 하나로만 여겨졌다는 뜻이다. 제대로 된 깊은 반성은 양쪽 모두에게서 찾기 힘들다.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침략을 저지른 나라의 학생들은 왜란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한다.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탓이다. 우리 또한 전쟁을 되새기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징비록> 같은 ‘실패 사례집’을 주의 깊게 읽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치와 외교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를 다잡아야 한다. 2001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새로운 ‘십자군 전쟁’이라고 말했다. 역사를 제대로 알았다면 과연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까? 충실한 역사 반성이 있었다면, 우리와 일본 사이에 미묘한 감정선도 자리할 곳이 없을 테다. 공동 역사교과서를 쓰는 프랑스와 독일처럼 말이다. 살다보면 싸움은 언제든 있을 수 있다. 제대로 반성하고 화해한다면, 다툼은 되레 관계를 깊게 하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이해와 용서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싸움은 상대를 영원히 용서 못할 적으로 만든다. 나라들 사이가 안 좋아지면, 지나온 역사는 늘 전쟁의 명분이 된다. 아랍과 서방 세계, 우리와 일본의 관계는 과거를 ‘쿨’하게 여길 정도로 매끈할까? 갈등의 뿌리는 사이좋을 때 뽑는 편이 낫다. 역사에 대한 반성이 시급하고 중요한 이유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_timas@joongdong.org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