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부터 밝히는 또라이 아냐? 왜 일도 안 하고 임금부터 물어요?” <한겨레> 취재진이 현장 취재를 위해 보조출연자 일자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ㅎ기획사 지부장에게 출연료를 묻자 욕설이 날아왔다. 그는 “다른 기획사 알아보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난해 <한국방송>(KBS) 드라마 <각시탈> 보조출연자 탑승 차량 전복사고를 계기로 보조출연자가 개인 사업자에서 노동자로 인정받은 지 1년이 지났지만, 보조출연자는 제 임금을 묻는 것조차 여전히 힘겹다. 방송 역사 60년 만에 보조출연자 근로계약서가 도입된 시점도 불과 3개월 전이다. 근로계약서가 조금씩 작성되고는 있지만 정착은 아직 멀었다.
여러 기획사에 등록돼 10년째 보조출연자로 일해온 ㄱ씨는 최근 기획사 한 곳과 근로계약서를 작성했다. “ㅎ기획사에서 20년 넘게 일한 언니들한테 근로계약서 썼냐고 물어봤더니, 그런 거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직 모르는 거죠. 다른 기획사 한 곳에서 계약서를 쓰라고는 했어요. 하지만 법적 효력에 대한 설명은 못 들었어요.”
근로계약서를 써도 부당한 내용이 많다. 출연한 뒤 임금 지급까지는 최장 2개월이 걸리고, ‘임금 지급 기일 연장에 합의한다’는 강압적 조항은 고용노동부가 배포하는 표준 근로계약서와 거리가 멀다. 지상파 방송3사와 계약을 맺고 있는 주요 기획사 5곳 가운데 3곳은 출연일이 속한 달로부터 두번째 달 1~3일, 나머지 2곳은 출연 다음달 말에 임금을 지급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노동위원장인 권영국 변호사는 “한 달에 한 번 임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한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획사의 임금 지급 방식 자체가 ‘갑질’이다. ㅎ기획사의 경우, 출연한 달로부터 두번째 달 1~3일에 사무실을 방문하는 보조출연자들한테만 임금을 지급한다. 보조출연자가 이 날짜에 맞춰 사무실에 가지 못하면 그달 둘째주 월요일 사무실에 가서 밀린 월급을 받아야 하고, 이때마저 놓치면 그 다음달 둘째주 월요일로 임금 지급일이 미뤄진다. 업무가 복잡해진다는 이유로 임금을 은행계좌에 이체해주지 않는 것이다.
보조출연자 ㄴ씨는 다른 기획사에서 진행하는 드라마 촬영 일정과 ㅎ기획사의 임금 지급일이 번번이 겹쳐 지난해 촬영한 임금을 여태 받지 못하고 있다. “4개월 전, 밀린 임금을 받으러 ㅎ기획사 사무실에 갔더니 도장이 없어서 임금을 줄 수 없대요. 지장도, 서명도 소용 없대요. 도장을 갖고 오든지, 다음달 둘째주 월요일에 오라는 거예요. 무슨 절차가 이렇냐고 물었더니 ‘여기 기획사 법이 그렇다’고 막 우겨요. 사무실에는 커다란 박스에 밀린 임금 봉투가 가득하더라고요. 저처럼 날짜 못 맞춰서 돈 못 받는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닌 거죠. 잊어버리거나 세월 흘러 임금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획사가 작성해 주는 ‘출연료 명세서’는 명세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출연 날짜, 프로그램명, 지급액만 포함된 출연료 명세서를 보고선 정확한 금액을 제대로 받았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지난 1일 보조출연자 3명이 ㅌ기획사에 임금 내역을 상세하게 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ㅌ기획사는 “내역이 없다”며 거절했다. 20년 경력의 보조출연자 ㄷ씨는 “출연료 문제를 따지면 피곤하니까 기획사가 임금 명세서를 주지 않는다. 프로그램명과 촬영 시간이 매번 바뀌는데다 임금도 최장 두 달 뒤에 받기 때문에 몇시간을 일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난다. 내가 계산한 임금과 실제 지급액이 달라도 근거가 있어야 따질 것 아니냐”고 호소했다. 5대 기획사 가운데 한 곳만 촬영 시작·종료 시간, 밥값, 숙박비, 출장시 지급되는 지역별 지원금 등을 임금명세서에 기록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이 정한 연장·야근 수당을 안 주는 경우도 있다. 지난달 종영한 종편채널 <제이티비씨>(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 동원된 보조출연자들은 연장·야근 수당을 받지 못했다. 근로기준법 56조는 연장 또는 야근시 통상임금의 50% 이상을 더해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이들은 기본 임금만 받았다. 가령 저녁 7시부터 밤 10시까지 3시간 연장 촬영을 하면, 기획사는 1만5000원을 임금으로 줬다. 시급 5000원에 불과한 금액인데도 ‘수당’이라는 명목을 붙였다. 보조출연자 ㄹ씨는 “기획사에 따졌지만, 노동청에 고소할 거면 하라고 했다. 일을 다시 받으려면 신고할 수도 없다”고 토로했다. ㅎ기획사 관계자는 “제작사 사정 때문에 근로기준법에 맞는 수당을 지급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보조출연자들이 고용노동청에 체불 임금을 받아달라고 진정해도, 기획사는 임금 내역 자료가 없다며 발뺌을 한다. 보조출연자 ㅇ씨 등 4명은 ㅌ기획사로부터 지난 3년간 연장·야근 수당을 받지 못했다고 지난 4월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고용노동청은 증거 부족 등으로 진정을 기각했다. 다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근로계약 관련 자료를 3년간 보존해야 하는 근로기준법 42조 등을 위반한 혐의로 ㅌ기획사를 기소 의견으로 서울남부지검에 송치했다. 보조출연자노조 관계자는 “기획사가 이제껏 제대로 된 임금 명세서를 주지 않아 체불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부족했다. 보조출연자들이 ‘촬영 일지 수첩’을 제시했지만 노동청은 객관적 증거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조가 임금 관련 문제를 제기하면 기획사는 내부 고발자 색출에 나선다. 지난해 7월7일 보조출연자 100여명은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추적자> 촬영이 이뤄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기본 근로시간보다 약 1시간 넘긴 저녁 7시58분에 일을 마쳤다. 그러나 ㅌ기획사 반장은 “보조출연 하루이틀 하냐. (연장 수당 없이) 기본 임금만 나간다”고 했다. 노조가 문제를 제기하자 ㅌ기획사는 뒤늦게 연장 수당을 지급하면서도 노조에 “당사가 직접 정확한 설명을 할 방침이오니 노조에 강력 항의한 출연자 명단을 전달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기획사가 한밤에 집합시간을 수시로 바꾸는 탓에 보조출연자들은 방송국에서 날을 지새우지만 이런 대기시간은 전혀 보상받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한국방송> 드라마 <칼과 꽃>에 동원된 보조출연자 ㅁ씨는 “자정께 모이라고 했다가 1~2시간 전에 문자메시지를 통해 집합시간을 미룬다. 6시간 미룬 적도 있다. 집에서 이미 출발은 했고, 대중교통은 끊겼고, 사실상 노숙을 할 수밖에 없다. 대기시간을 임금으로 보상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지난 8~9월 <한겨레> 취재진이 촬영장 잠입 취재를 벌일 때도, 집합시간이 수시로 바뀌었지만 밤샘 촬영 일정은 아니어서 노숙은 피할 수 있었다.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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