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오은의 오손도손
힘을 과시하거나 칭찬받고 싶어 놀리던 손
힘을 과시하거나 칭찬받고 싶어 놀리던 손
’슬쩍’ 친 손맛이 누군가에게는 매운 맛이 되기도 한다. 박미향 기자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는 뜻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뜻
백지 위에서 가장 위력적인 말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의 손을 더 이상 휘두르지 않게 되었다. 손으로 흥한 자는 손으로 망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도 같다. 손맛을 단단히 본 뒤에야 비로소 손을 뒤로 숨길 줄 알게 되었다. 십여 년 전쯤 초등학교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내가 등에 자주 손을 가져다 대던 친구였다. 그 친구는 그때의 일들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네 손, 진짜 매웠지. 몇 시간이 지나도 등이 여전히 벌겋더라고.” “아, 정말?” 내 손에 아직 매운 맛이 남아 있을지 궁금해서 오랜만에 친구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정말이지 몹쓸 호기심이었다. “으악!”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손이 매운 것은 타고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이는 손이 맵구나.” 첫 직장에 다닐 때 부장님으로부터도 손이 맵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부장님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부장님에게 매의 손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쓴 보고서를 보고 부장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손이 맵다”가 가진 두 번째 뜻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일하는 것이 빈틈없고 매우 야무질 때도 “손이 맵다”라는 표현을 쓰다니! 손이 맵다는 사실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일을 야무지게 처리할 수만 있다면, 매운 손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이 매운 것은 타고나는 것이면서 꾸준히 다듬고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손끝이 맵고 손때가 매운 것은 확실히 타고나는 것이지만, 어떤 일을 빈틈없이 해내려면 내내 긴장을 유지해야 했다. 딴생각을 하다 보면 매운 손은 금세 맥이 빠지거나 순식간에 야무짐을 잃고 말았다. 손이 매운 상태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집중력이 필요했다.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중심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손이 매워지는 대신, 일상이 싱거워지는 때가 많았다. 긴장이 풀리면 기다렸다는 듯 몸살이 찾아왔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나는 매운 것을 더 많이 찾게 되었다. 매운 손을 유지하는 데 매운 것이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먹을 때만큼은 기분이 좋았다. 매운 것은 왜 죄다 빨간 것일까 생각하며 추위에 벌게진 두 손을 호호 불며 집에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속이 종종 쓰렸고 등이 욱신욱신하기도 했다. 전학 온 친구가 내 등에 손을 가져다 대었을 때의 느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때마다 정신이 확 들었다. 도리질을 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매운 손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손이 매워지면 매워질수록 나도 모르게 주변에 소홀하게 되었다. 손이 매워진 만큼, 사람에게 매서워지는 것 같았다. 웃는 나와 친절한 나, 재기 발랄한 나는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멀티태스킹은 사람이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일에 깊숙이 빠져 있다 보니, 더 완벽하게 일을 수행하려고 정신을 벼리다 보니 역설적으로 나 자신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집에 돌아올 때에는 늘 ‘매운 것’을 다 소진해버린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매운 김치가 어느 날 갑자기 시금시금하게 쉬어버리듯이, 온 힘을 다해 매운 손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내 몸은 생기를 잃고 있었다. 실은 시를 쓸 때 가장 손이 매워야 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단어들이 자꾸 도망가는 느낌이 들었다. 맑고 투명한 단어들은 매운 손에서 스르르 미끄러졌다. 공교롭게도 그때 “손이 맵다”가 지닌 세 번째 뜻을 알게 되었다. 가축, 날짐승, 식물 따위를 거둔 결과가 다른 사람에 비하여 늘 좋지 아니한 경우를 이를 때도 “손이 맵다”라는 표현을 쓴다고 했다. “그는 손이 매워서 키우는 식물들을 번번이 죽이고 말았다”와 같은 문장에서 손이 맵다는 사실은 그 예의 야무짐과 정반대에 있는 것이었다. 이렇듯 손이 매우면 손길을 받는 대상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처음에 손이 맵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그것을 함부로 놀리던 때도 있었다. 손이 맵다는 것이 칭찬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속에 매운 것을 허겁지겁 욱여넣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매운 손에 스스로 손이 묶여 일을 그르치기도 했다.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슬쩍’이 ‘번쩍’이 되던 순간을 떠올린다. 손이 맵다는 것은 어쩌면 어떤 순간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순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매운 손은 어쩌면 그 순간들이 담길 백지 위에서 가장 위력적일 것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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