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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요, 저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파

등록 2017-04-12 20:29수정 2017-04-12 23:41

[ESC] 오은의 오손도손
“손을 든다는 건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
교실에서 손을 드는 행위는 자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행동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교실에서 손을 드는 행위는 자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행동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윤동주, ‘무서운 시간’(<정본 윤동주 전집>, 문학과지성사, 2004) 중에서

여덟 살 때의 일이다. 국어 시간이었는지 산수 시간이었는지, 선생님은 칠판 위에 분필로 문제를 하나 적어놓고 풀어볼 사람 있으면 손을 들라고 말씀하셨다. 아이들은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오답도 있고 정답도 있었지만 선생님은 손을 든 모든 아이들에게 칭찬을 해주셨다. 손을 드는 것은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자세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도 같다. 그것이 조금 엉뚱하고 특이해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다. 손을 든다는 것은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어느 날, 가족끼리 둘러앉아 다 같이 티브이(TV)에서 방영해주는 영화를 보았다. “손들어, 꼼짝 마!” 형사는 범인을 쫓고, 범인은 온 힘을 다해 달아나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범인은 순순히 손을 들었다. 형사는 잽싸게 범인의 뒤로 가 그의 손을 붙잡아 내린 뒤, 손목에 찰칵 수갑을 채웠다. “손을 드는 것은 항복한다는 신호야?” 아빠에게 물었다. “응,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손을 들어.” 다음날부터 나는 물총을 들고 다니며 “손들어!”라고 외치고 다녔다. 또래들은 십중팔구 손을 들었지만, 어른들은 좀처럼 손을 들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엄마를 붙들고 물었다. “엄마, 학교에서는 손을 들면 발표를 할 수 있잖아. 근데 악당들은 학교도 아닌데 왜 손을 들어?” 나의 엉뚱한 질문에 엄마가 피식 웃었다. “은아, 학교에서는 손을 어떻게 들었어?” 나는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영화에서 악당은 손을 어떻게 들었어?” 나는 만세 부르는 자세를 취하며 머리 위로 두 손을 천천히 들었다. “이제 차이를 알겠어?” 손을 직접 다시 들어봄으로써, 손드는 일이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한 손만 드느냐, 두 손을 다 드느냐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자발적으로 손을 드느냐, 누군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손을 들게 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물론, 학교에서 늘 자발적으로 손을 드는 것은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떠들거나 친구와 다퉜을 때, 나는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들었다. 뜨거운 낯과 저리는 무릎을 온몸으로 견디는 시간이었다. 아까는 발표하기 위해 당당히 한 손을 들었는데, 벌을 서야 해서 두 손을 들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니 처량했다. 어느 날, 국어사전에서 ‘두 손 들다’라는 관용어를 찾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자기 능력에서 벗어나 그만두다’라는 뜻과 ‘전적으로 환영하거나 찬성하다’라는 뜻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당연히 ‘벌 받다’라는 뜻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어린시절 호기심 속 손 들기
대학 입학 뒤 아예 그만둬
나이 들어선 두손·두발 다 들기
이젠, 내 말 하기 위해 손 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년에는 전자 때문에 손을 드는 경우가 확실히 많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손을 드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번번이 나를 가로막았던 것 같다. 질문이 생겨도 손을 들어 답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그것을 가슴에 품고 조용히 돌아오곤 했다. 무엇보다 손을 드는 일이 남 앞에 나서는 일, 나 자신을 쓸데없이 과시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호기심이 많아 손을 자주 들곤 하던 친구를 고깝게 바라보는 아이들도 많았다. 사춘기 탓인지 자신감이 없어진 탓인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내 손은 늘 무릎 위에 있었다. 손이 무거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가 무거워진 건 분명했다.

고등학교 시절, 스트레칭을 하다 내가 손을 든 것으로 보였는지 선생님이 나를 지목하시기도 했다. “그 손 아닌데요?” 교실 안이 일순 웃음바다가 됐다. “그 손이 어떤 손인데?” 선생님의 짓궂은 질문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평소에 궁금하던 것들이 많았지만 입안에서만 웅성거릴 뿐이었다.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것을 차마 일기장에도 적지 못하던 나날이었다. 임기응변이랍시고 이렇게 대답했다. “화장실 다녀와도 되나요?” 아이들이 크게 웃었다. 손들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것,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차라리 실없는 농담을 하는 것, 나는 그것이 철드는 과정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손드는 일은 아예 사라졌다. 교수님이 질문을 던지면 우리는 사이좋게 고개를 떨궜다. 확신이 들지 않아서였다. 실제로 내가 선택한 길이 맞을까 하는 불안감에 시종 사로잡혀 있었다. 알고 싶은 것이 오로지 미래뿐인 시절이었다. 어느 날엔 영국에서 온 박사님이 하는 특강을 수강할 일이 있었다. 교수가 가벼운 질문을 던졌는데 우리는 평소처럼 함구했다. “애니원? 애니바디?”(Anyone? Anybody?) 교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공간에 있던 우리는 모두 그 순간, 아무도 아니었던(노바디, nobody) 셈이다. 질문은 자신감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손드는 일은 어느새 부끄러운 일, 겸연쩍은 일이었다.

반면, 나이를 먹을수록 후자 때문에 손드는 일이 늘어났다. 첫 회사에 들어가고 내게 부과된 업무를 수행하는 데 매일 애를 먹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라 낯설기도 했지만, 잘하고자 하는 의욕이 앞서 일을 그르치기 일쑤였다. 옆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여유로워 보였는데 나는 늘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할 수 있겠어?”라는 질문에 “하겠습니다” 이외의 답을 찾기가 힘들었다. 개중에는 내 능력에서 벗어난 일도 있었다. 어떻게든 해내려고 아득바득 애를 쓰다 보면 몸과 마음에 극도의 피로가 몰려왔다.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쓰러지듯 잠을 청할 때가 많았다. 손드는 것은 항복하는 일이었다. 능력이 부족한 나 자신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다.

낯선 곳에 가도 손드는 일이 많았다. 고집으로 똘똘 뭉쳐 있는 집단, 자기의 생각만 옳다고 믿는 사람들 틈 속에서 내 의견을 말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기꺼이 손들어 그 의견에 동조할 수도 없었다. 내게 우호적이지 않은 곳에 가면 손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손들어 찬성할 수도, 반대로 손들어 내 의견을 피력할 수도 없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이 된 것 같아 초라해졌다. 틀린 답이라 할지라도 스스럼없이 손을 들고 발표를 하던 어린 나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눈치를 보고 주위를 의식하는 나만 있었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정답들에 둘러싸여 지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날, 집에 오는 길에는 늘 가로등 밑에서 기지개를 켰다. 내가 유일하게 뜻대로 손을 드는 시간이었다.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했어’라는 후회와 ‘그 사람의 고집에 그렇게 쉽게 손들면 안 됐었는데’라는 자책이 온몸을 휘감았다. 집 앞에서 부자(父子)가 지나가는 광경을 보았다. “질문 있습니다!” 하드를 입에 문 아이가 아빠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바로 거기 있었다.

자유가 없을 때도 손을 들고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때도 손을 든다. 이제는 반대로 나의 말을 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손을 들어야겠다. 나 자신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내 안의 엉뚱함을 더욱더 긍정할 수 있도록. ‘한 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는 결국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가 될 수밖에 없다. 질문이 없는 사람에게 답이 떡하니 주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 말을 하기 위해 손을 들 수 있는 상황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기회이자 내가 누려야 할 권리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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