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오은의 오손도손
위기 모면 위한 ‘손 빼기’로 우정 금갔던 경험…필요한 건 ‘함께하는 온기’ 깨달음
위기 모면 위한 ‘손 빼기’로 우정 금갔던 경험…필요한 건 ‘함께하는 온기’ 깨달음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때로 놀다가 선생님께 야단을 맞기도 한다. 시인 오은도 이런 경험이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잔머리로 혼자 빠져나가 죄책감
“개는 손을 감추면 문다”
다시 손 뻗기의 어려움 절감 때마침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셨다. 반사적으로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실내화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재빨리 그것을 발에 신었다. 내 안에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민첩함이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미처 실내화를 신지 못한 친구들이 손에 실내화를 든 채 망연하게 서 있었다. “거기 세 녀석, 앞으로 나와!” “너희 셋이 다야?”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불쑥 나를 지목하며 말씀하셨다. “그런데 넌 왜 그렇게 땀을 뻘뻘 흘려?” “네? 저, 저, 저는 쉬는 시간에 운동장을 뛰었어요.” “난데없이 왜?” “네?” 선생님은 다 알고 계시다는 듯 더 이상 추궁하지 않으셨다. 이미 땀이 흥건한 얼굴 위에 거짓말처럼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50분 동안 복도에서 손을 들고 앉아 있었다. 보이지도 않는데 내 눈은 자꾸 복도 쪽을 향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생생한 죄책감이었다. 수업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초침 소리에 맞춰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자꾸 흘러내렸다. 다음 쉬는 시간이 되었다. “거기서 어떻게 그렇게 손을 뺄 수가 있냐?” 벌섰던 친구들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너는 의리도 없냐?” “너는 진짜 잔머리 대장이야.” “앞으로 너랑 안 놀아.” 순식간에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손을 빼버린 무책임한 아이, 그 와중에 잔머리를 쓴 영악한 아이, 그것도 모자라 우정까지 배신한 못된 아이가 되었다. 아홉 살이 생각하기에 의리는 장래 희망처럼 너무 멀리 있는 단어였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내화를 신고 있던 발이 내내 저릿저릿했다. 한동안 그 친구들은 나와 놀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나 대신 다른 아이와 함께 넷이 탁구를 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나 하는 생각에 억울하기도 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뒤로도 다급한 상황이 닥치면 나는 또다시 별생각 없이 손을 빼버리고 말았다. 다른 친구를 사귀고 잘 어울리다가도 어김없이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반복되었다. 비슷한 패턴으로 친구들이 떠나가는 것을 깨닫고 어느 날 나는 스스로를 질타했다. 문득 선생님의 뼈 있는 물음이 귓가를 맴돌았다. “난데없이 왜?” 나는 비겁해서 난데없이 손을 빼곤 했던 것이다. 잘못의 근원에 가닿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한번 담근 손을 섣불리 빼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바둑을 둘 때 손 뺀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바둑에서는 상대방이 던진 수를 외면하거나 형국이 무난하다고 믿고 더 이상 응수하지 않는 경우를 일컬어 손을 뺀다는 말을 사용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바둑에서 빼는 손은 내가 빼곤 하던 손과는 완전히 반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손을 빼기 위해 속임수를 썼지만 바둑에서는 속임수에 들지 않기 위해 손을 빼야 한다. “어떤 일에 발을 들였다가 영 이상하다 싶으면 손을 빼야 해.” 상황에 따라서는 잠자코 기다리는 일보다 손을 빼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개는 손을 감추면 문다”고 한다. 사람이 손 뒤에 뭔가를 숨겼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나는 손을 빼서 감추는 바람에 친구와 사이가 벌어졌다. 순간적으로 위기는 모면했지만 우정은 쉽게 회복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손을 빼고 난 다음에는 언제나 ‘텅 비어 있다’고 느꼈다. 내가 손을 뺀 자리에는 손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손을 빼는 일, 그러니까 하고 있던 일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빠져나온 일을 향해 다시 손을 뻗는 일은 몇 배로 힘들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는 그 전으로 돌아가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손을 담그던 사람과 손을 빼려는 사람 사이에 필요한 것은 함께하겠다는 온기다. 그리고 이 온기는 혼자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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