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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멈춘다는 것, 삶에 감사한다는 것

등록 2017-03-01 19:29수정 2017-03-02 14:55

[ESC] 오은의 오손도손
우연찮게 들른 경남 통영 함바집의 풍경 가운데서
한 공사장의 함바집 풍경. 이정우 기자
한 공사장의 함바집 풍경. 이정우 기자
추운 겨울 어느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고영민, ‘공손한 손’(<공손한 손>, 창비, 2009) 전문

우연찮게 종종 찾게 되는 도시가 있다. 내게는 통영이 그런 곳이다. ‘우연찮게’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처럼, 꼭 우연한 것은 아니나 뜻하지도 아니하게 찾게 되는 곳이란 소리다. 사천시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불쑥 들른 곳도, 거제도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못내 아쉬워서 찾은 곳도 통영이었다. 통영에 가면 늘 손발이 정신없었다. ‘다찌집’에 가서 상다리가 휘어지는 모습을 마주하고 젓가락을 부산하게 놀렸다. 다찌집의 어원을 살펴보다 그것이 ‘서서 대충 먹는다’는 뜻인 걸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한 적도 있었다. 한국인들은 서서 대충 먹을 때조차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먹는 것일까 생각하곤 맥없이 웃고 말았다. 동피랑 벽화마을을 오르락내리락할 때면 맵찬 바닷바람이 코를 찔러댔다. 바닷바람에 시종 펄럭이는 빨래들은 내게 비밀스러운 얘기를 건네는 것 같았다. 그 다정함이 괜히 좋았다.

몇 년 전, 학회 참석 때문에 통영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게 통영은 해를 걸러 이쯤 되면 한번 올 때 되지 않았느냐고 주문을 거는 도시 같다. 때마침 시간이 나서 통영에 하루 일찍 방문하기로 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내려가서 무작정 골목골목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곤 하는 내게 국내여행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적어도 한국에선 말이라도 통하니 말이다. 중국에 갔을 때 숙소 예약이 안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길바닥에 3시간 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적도 있는 나였다.

적당한 긴장과 적당한 불안을 품은 채, 통영에 도착했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통영항도 있고 남망산 조각공원도 있고 내가 더없이 좋아하는 동피랑 벽화마을도 인접해 있는 북신동에 가기로 했다. 적당한 긴장과 적당한 불안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연신 손을 비벼대고 있었다. “택시 안이 추워요?” 택시기사님이 히터 온도를 올렸다.

새벽부터 일한 이들 모두
공깃밥 뚜껑에 손을 올렸다
배고픔 앞에서 품위를 지켰다
기다림에서 온기를 발견했다

조각공원에 갔다가 배가 고파 시내로 내려왔다.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의 얼굴에 사이좋게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남색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2층 식당으로 우르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 저기 맛있겠다.’ 어떤 확신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무리에 몸을 실었다. 아저씨들이 나처럼 손을 계속 비비고 있어서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물론 아저씨들에게서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오늘은 어떤 반찬이 나올까?’라는 기대 섞인 법석임이었다. 식당에 올라가니 스무 가지 남짓의 반찬이 뷔페식으로 놓여 있었다. 우리가 흔히 ‘함바’나 ‘함바집’으로 부르는 식당이었다. 다들 익숙한 듯 널찍한 접시를 들고 반찬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등 떠밀려 접시를 들고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까지 집어 드니 배에서 꾸르륵꾸르륵 소리가 났다. 평소라면 결코 엄두도 내지 못할 양을 수북이 쌓았다. 반찬이 모자라면 나중에 다시 담으면 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도 못했다. 많이 담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도태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더는 담을 수 없을 만큼 접시가 가득 찼을 때 이윽고 손을 멈추었다.

“오랜만에 현장에 나왔더니 더 배가 고파.” 아저씨 한 분이 익숙한 듯 밥솥에서 공깃밥을 꺼내 들며 씩 웃었다. 쭈뼛거리다 나도 공깃밥을 하나 꺼냈다. 묵직했다. 자리로 이동한 사람들이 공깃밥을 앞에 두고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쩌다 보니 테이블 끝에 자리를 잡게 된 나도 섣불리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과 일행이라도 된 것 같았다. 옆을 흘깃 바라보니 모두들 공깃밥 뚜껑에 두 손을 공손하게 올려두고 있었다. 밥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를 두 손 가득 느끼고 있었다. 쌀쌀한 날이었다. 따뜻한 것이 절실한 날이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데 울컥했다. 목울대를 타고 뜨끈뜨끈한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새벽부터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일을 했는데도 그들은 밥 앞에서 잠시 손을 멈출 줄 알았다. 기다림에서 온기를 발견할 줄 알았다. 배고픔 앞에서 품위를 지킬 줄 알았다. 직전의 순간을 훈김으로 채울 줄 알았다. 꼭두새벽부터 일한 것이 나였다면 아마 허발을 하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손을 멈춘다는 것은 하던 동작을 잠깐 그만둔다는 뜻이다. 몇 초 후, 몇 분 후를 향해 온몸과 온 마음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부단히 움직이던 손이 멈출 때에는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리듬을 깨는 일은 여간해서 쉽지 않다. 다른 것은 배제하고 너에게만 집중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잠깐의 시간은 어느 때보다도 존엄하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손을 멈추던 장면은 자기 전에 문득, 길을 걷다 불쑥, 밥을 먹다 불현듯 눈앞에 펼쳐진다.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일상에 길들여진 나를 덮치곤 한다.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나를 좨치는 것 같기도 하다.

길 위에서도 절로 손이 멈추는 때가 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불어오는 바람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버스정류장에서 노선을 확인하다 우연히 어릴 적 살던 동네 이름을 마주할 때, 버스를 타고 가다 상점 밖으로 빠져나오는 고등학교 동창과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의 손은 별도리 없이 멈추고 만다. 손이 멈춘 순간으로 자발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기도 하고 그 사람의 마음에 내 마음을 대입해보기도 한다. 이처럼 손이 멈추면 무방비 상태가 된다. 다른 시공간에 아주 잠시 동안 심신을 내주어야 한다.

초등학교 시절,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올 때 우리들은 일제히 손을 멈추었다. 집에 가는 도중에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손과 발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타깝게도 커갈수록 손을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점점 더 많이 직면하게 된다. 훈련소에서 교관이 명령할 때, 거래처 사장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멈춘다. 그것은 자발적인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 손을 멈추기로 마음먹은 게 나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손을 멈추지 않으면 더 큰 사달이 날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의 손은 멈추고 싶은 것이라기보다는 감추고 싶은 것에 더 가깝다.

예전에는 통영 하면 생굴과 충무김밥이 떠올랐었다. 그러고 나서야 동피랑 마을의 벽화들과 방파제에서 바라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금은 통영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손들이 떠오른다. 공깃밥 앞에서 일제히 멈추던 손들이, 따뜻한 것 앞에서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울컥 치밀어 오르게 만들던 열 개의 손가락들이. 그 손들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더없이 뭉클해져서 또다시 손을 멈춘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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